[판소리] 노인과 바다 by. 이자람
판소리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전통적인 음악. 소리꾼과 고수의 합을 맞추는 놀이. 아니면 지겹고 따분한 옛날이야기.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은 없는 이야기이다. 소리꾼이 노래와 춤과 이야기를 무대 위에 관객들에게 쏟아낸다. 한자어로 뒤섞인 문장들은 북소리 장단에만 맞춰 들려오는데 우리는 잘 모른다.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너무 어렵고, 지쳐서 포기해 버린다. 나 또한 판소리를 완창으로 듣는다는 것은 꽤나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만큼 어려운 전통극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판소리를 듣는가? 전통을 기반으로 우리나의 옛것을 지키기 위해 듣는다. 이러한 이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소리꾼 이자람의 새로운 소리를 찾아 들어보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전통 판소리인 다섯 마당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양의 소설을 배경으로 만들어낸 현대 판소리 바로 이자림의 ‘노인과 바다’를 말이다.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노인과 바다’를 기반으로 만든 판소리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믿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판소리는 심청이의 인당수 이야기, 춘향이가 이몽룡과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런데 쿠바에 살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듣는다니 이것은 관객들에게는 너무 생소했다.
하지만 소리꾼 이자람은 이러한 판소리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영역에 성공했다. 많은 극장에서 그녀의 판소리를 찾았고, 관객들도 생소하고도 낯선 판소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갇혀있던 문화의 새로운 족보를 남긴 셈이다. 그러나 도전은 위대했지만 여전히 현재의 위치는 불안하다. 아직도 판소리라는 개념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문화예술이다. 국가가 문화를 지탱하고, 전통을 떠받들어야만 하기에 새로운 시도와 음악적인 진화를 거듭하기에는 관심도 부족하고,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수의 무대 위에서 판소리를 불렀다. 소리꾼으로서 살아가는 그녀에게 판소리를 세상에 새롭게 남기는 것이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대를 휘어잡으며 관객들과 장단을 맞추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는 아직 알 수 없다. 전통을 기반으로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맞는가. 새로운 기법과 발상으로 문화의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논쟁을 하며 서로 다른 의견으로 문화적인 문제를 접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판소리라는 전통문화의 소리를 현대까지 꾸준히 이끌어 가려는 명창들의 노력이다. 서로 다른 의견적인 대립이 있겠지만 이것은 단순한 대립보다는 판소리라는 문화를 수호하려는 그들의 자세이기에 더욱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이자람의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판소리라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그녀의 고민 끝에 내린 당돌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소리꾼이 부채를 펴고, 공연장이 쩌렁쩌렁하게 울린 판소리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특히나 이자람만의 판소리는 분명히 외국어로 쓰인 소설이지만 듣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노인과 바다가 한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같다. 그만큼 판소리라는 고유의 장단과 음악성 그리고 서사를 기반으로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뒤섞인 표현들이 판소리의 새로운 온도를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느껴진다. 판소리는 생소하다고 언제나 퓨전 판소리를 통해 판소리를 알릴 수는 없다. 전통적인 옛 것을 보존해야 하는 숙명은 남아있다. 한자어로 뒤섞인 옛날 말들의 판소리를 쉽게 풀어낸다. 노래 가락을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씩 해결되지 못한 과제 같은 것을 맞춰나가면서 전통을 지킨다. 이것이 완벽한 해결책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는 없다.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의 태도를 통해 세상에 판소리를 남기는 일을 게으르지 않게 한다면 그 결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