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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Dec 29. 2021

[철학 에세이] 인간은 존엄한가?

존엄하지 않다. 하지만 존엄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한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다.

 철학은 언제나 미완성 지혜를 향한 노력이듯이 인간의 삶은 언제나 미완성의 자기실현을 향한 고독한 투쟁이다. 일련의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의 초월에 대한 욕망을 부정한다. 현대사회에 많은 사람은 고르기아스의 표현대로 완전성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고 안다 해도 전달할 수 없는 허구의 실체이자 주관적 체험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사실 철학은 완전성을 담보하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불만에서 표출되는 저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삶은 고통과 지루함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는 쇼펜하우어의 금언이 세계의 본질을 가장 잘 대변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결코 참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에 덧붙여 프로이트는 애당초 신의 계획에 인간의 행복은 계획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삶은 일순간도 안전할 수도, 안정될 수도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는 "그들은 사랑하면 정욕이 사라지고, 정욕이 사라지면 사랑할 수 없었다"라는 말로 사랑의 근원적 미완성을 역설한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영원의 노래는 순간의 감정으로 얼룩지며 순간의 불안한 감정은 영원을 맹세한다.

 진리란 영원이란 무한이란 완전이란 언제나 끊임없이 멀어지는 지평선과 같다. 나아가면 가까워지지만, 가까워지면 멀어지는 영원한 변주곡에서 인간은 결코 탈출할 수 없다. 플라톤을 지도로 스피노자를 돛대로 비트겐슈타인을 나침반으로 삼아도 인간은 결코 찬란한 지평선에 도달할 수 없다.     

 이러한 실존적 한계와 고독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해도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초월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순간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선택과 의지와 계획이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 삶의 총체라고 외치는 사르트르도 평생 찡그린 표정과 파이프 담배를 통해 초월을 갈망했다(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없으며 꿈틀대는 욕망을 제어할 수도, 관조할 수도 없다. 대다수 학문은 부조화와 불일치에 대한 변명이며 합리화일 뿐이다. 차라리 그 사태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예술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예술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려 한다. 숭고한 미적 심상을 통해 인간의 굴레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문학을 통해 정신착란에서 탈출하려던 나쓰메 소셰키처럼. 자신의 귀를 자르며 화폭 앞에 앉은 고흐처럼. 싸늘한 그림에서 슬픔이 주는 기쁨을 느낀 에드워드 호퍼처럼. 온몸에 마비 증상이 올 때까지 천장화를 그림 미켈란젤로처럼. 하지만 그 누구도 완전성을 소유하지 못했고, 소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명제에 의하면 인간은 불완전하고, 완전할 수 없고 존엄하지도 않다.

 과학주의자들과 R.도킨스에 의하면 인간은 염색체의 꼭두각시이며 동물원의 침팬지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사실적인 관점에서 인간에게 초월은 허황된 꿈이며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진리란, 완전성이란, 무한이란, 영원이란, 초월이란 언제나 당위명제이다. 인간은 초월해야만 한다. 아니 인간은 초월을 지향해야만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세련된 도구를 만드는 데에, 본능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에, 욕정을 예술이라는 추상으로 환원시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보장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초월을 향해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의지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유의 형이상학은 죽음을 달관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의 소멸에 불안해하며 우정의 파괴에 분노하고 자본의 부재에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이런 유의 형이상학은 인간다움에 대한 끝없는 성찰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에서 비롯되므로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렇게 소멸하지 않는 당위명제로서의 인간의 초월에 대한 희구는 회의주의자보다 더 회의적이며 실존주의자보다 더 결연하다.

 현실에 저항하고 싶을 때는 권력이 부족하고, 힘이 있을 때는 대체로 비겁해진다. 하지만 본질적 욕망. 근원적 욕망인 초월만큼은 사수하는 인간이기에, 스스로를 기만하면서도 반성하고, 위태하면서도 견고하고 딱딱하면서도 유연하다.

 이런 형이상학적 인간은 그래도 행복을 논할 자격이 있다. 행복할 수 없지만, 행복을 논하는 게 행복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도 알 수 없으며 안다고 해도 전달할 수 없으니 이것저것 현실에 안주하며 살겠다는 일련의 주장들보다 우월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사실명제에 순응할 수도 있고 당위명제에 복종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검토의 끝에서 진솔하게 나를 마주할 때, 인간이 아무리 자기 자신을 직접 만나볼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초월을 향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존엄해야만 하고 초월해야만 한다.


                                                                        -끝-




<앞으로 인간 존엄성에 관해 탐구하고, 연구 방향이 명료해지면 이를 논문 주제로 삼을 작정입니다.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누구나 인간이 존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정작 근거가 마땅치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라는 선언이 현실이 아닌, 규범적인 선언인 것처럼 인간의 존엄도 사실에 의해 입증할  있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아래의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차후 논문 주제의 아이디어를 위해 독자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남겨주세요. 질문은 “ 인간은 존엄한가?”입니다.>



*타이틀 이미지 ‘인간의 존엄’과 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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