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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Jan 12. 2022

[영화추천-칠드런 액트] 최선은 없다

만약은 없다. 그리고 최선도 없다.

만약은 없다. 그리고 최선도 없다. 하지만 ‘최선’에 대한 담론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영화 소개>


존경받는 판사 피오나는 결혼생활의 위기를 맞은 가운데, 치료를 거부한 소년 애덤의 생사가 달린 재판을 맡게 된다. 이틀 안에 치료를 강행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애덤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피오나는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고, 그날의 만남은 두 사람의 삶에 예기치 않은 파장을 일으키는데……

(N 사의 영화 기본정보 - 소개 문구 발췌)




‘영화 대 영화’였는지, ‘영화가 좋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상기 스토리의 <칠드런 액트>를 꼭 보겠다고 다짐한 게 무려 3년 전이다. 어느새 시간이 3년이나 흘렀다.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는데도 3년, 고등학생이 성인이 되는 데 주어진 시간도 3년이다. 예수님은 30살에 출가하여 사역을 시작했고, 3년 후인 33살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함으로써 구원 사역을 완성했다. 2018년에 코로나는 저가 맥주 상표에 불과했고, 3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의 첫 번째 정의는 바이러스이다.

 

그러니 3년 전의 다짐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영화 제목조차 생소하게 느껴졌으니까. 정말이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칠드런 액트>를 10년이나 묵혀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물의 형식이 사태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법. 넷플릭스 알고리즘은 기막히게 <칠드런 액트>를 추천했고, 기억 속의 다짐이 되살아났다.


 엠마 톰슨(피오나 메이 역)과 스탠리 투치(잭 메이 역)가 나오는 영화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엠마 톰슨은 그새 ‘크루엘라’의 바로네스 역으로 그 위상을 (더욱) 높였고, 스탠리 투치는 ‘사일런스’로 할리우드의 주연급 배우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태초부터 완성형 배우였나 보다. <칠드런 액트>에서의 그들의 감정 연기에 미숙함 따위는 없었다. 완벽한 연기와 급하지도 늘어지지도 않는 전개. 뇌리에 남는 OST. 그리고 완전한 마무리. 봉준호 감독의 말대로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영화. <칠드런 액트>는 “Beyond 수작”이다.



 <무엇이 최선인가>


 영화의 주제는 하나의 질문, “무엇이 최선인가”로 수렴된다. 핀 화이트헤드(애덤 헨리 역)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수혈을 거부하는데, 그 선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주체와 대상 불문, 시종일관 헷갈린다. 애덤의 (수혈 거부에 대한) 의지의 근원이 부모의 종교적 신념이라고 결론 내기도 애매하고, 조숙한 미성년의 담대한 자유의지라고 보기에도 모호하다.

 이런 상황에서 피오나는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한다. 말할 필요 없이 판사의 센텐스는 항상 최선을 향해야 마땅하지만, 판사 역시 사람일 뿐이니 최선의 판결을 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한계 내에서의 자위적 외침에 불과하다. (필자처럼 교황의 무오류성을 믿지 않는다면, 판사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피오나는 남편 잭이 공개적으로 불륜 행위를 하러 가는 순간에도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고, 그에게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비공개 연회장까지 수백 킬로를 쫓아온 비에 젖은 애덤에게 작별 인사로 키스를 하며 묘한 표정을 짓는 피오나. 그녀는 자신의 판결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위를 최선이라는 어휘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의 중심 사건인 애덤에 대한 판결에서도, 피오나의 선택은 여전히 위태롭다. 그녀는 재판 중 이례적으로 휴정을 선언한 후 애덤을 만나, 애덤의 의지가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확인하기로 한다. 애덤을 만나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애덤이 하나의 기호가 아닌 살아있는 인격체라는 것이다. 그녀가 애덤에게 느끼는  친밀감이 Eros 적인 것인지, Philia 적인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그녀는 애덤에게 모종의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은 애덤의 요청에도 불구, 수혈을 명하는 판결로 이어진다.



<피오나가 애덤에게 느낀 감정>


 애덤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피오나와 애덤은 기타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 - Down By The Sally Garden]의 가사를 통해 피오나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다. (예이츠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

 

 “그녀는 나뭇잎이 나무에서 자라듯, 사랑을 느긋하게 하라 했지만,

 난 그때 젊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풀이 둔덕에서 자라듯, 인생을 느긋하게 살라 했지만,

 난 그때 젊고 어리석어 이제아 온통 눈물로 가득하네요”


 피오나는 애덤의 결단에서 타산성 없는 순수함을 느꼈고, 사랑이 없는 자신의 결혼생활의 무미건조함에 애통해했다. 동시에 애덤의 순간적인 혈기에서 기인한 충동과 우발이, 훗날 애덤에게 후회를 남길 것이라고 판단했고, 자신의 결혼생활의 소원함도 풀이 자라는 제과정의 일부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 즉 젊은 시절의 폭발하는 연정과 중년의 느릿한 친밀감이 교차하는 지점 어딘가에 피오나는 서있다. 하여, 피오나는 애덤에게 Eros와 Philia의 물매에서 갈팡질팡한 게 아니라, 애덤을 통해 자신과 남편의 관계의 전환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피오나가 애덤과의 작별 순간, 애덤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한 것은 (피오나의) Eros 역사에 작별을 고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랑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법이다. 누구도 여름의 사랑만을 할 수는 없다.



<최선은 어디에 있는가>


 친한 동생의 카톡 상태 메시지가 기억난다. “만약은 없다.”

 이 영화를 통해 추상하고픈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최선은 없다.”


 최선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현재의 분출하는 Eros와 훗날의 따뜻한 Philia가 교차하는 과정이 인생사이다. 따라서 순간의 타오르는 감정을 사랑으로 규정하며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라는 연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고, 중년의 친애를 애정의 참모습으로 바라보며 ‘최고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노부부의 고백도 정당화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지루함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라는 말을 남겼다.


 이 영화는 “인생이란 연정과 친애 중 하나만을 최선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인 게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확실한 건, 현시점의 호르몬의 독단성에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삶이나, 미래의 안락함을 위한 애정 없는 계약으로 이루어진 삶에 최선은 없다는 것이다.



최선을 논할 자격


 우리는 자신과 주변인의 협소한 경험에 갇혀 모든 것을 재단하고, 가볍게 ‘최선’이라는 말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결코 별것 없는 시시한 게임이 아니고(제발 “인생 뭐 있냐”라는 건배사를 하지 말자) 인간은 그렇게 한심한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생은 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인간 정신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볍다고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요는,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에는,

 호르몬에 지배받는 노예로만 규정되기에는,

 이 바닥의 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항의지를 포기하기에는,

 그리고 오직 나만큼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 비겁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렇게 허접하게 살기에는,

인간은 너무 위대한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급하게 최선을 정의 내려서는 안 된다. 범박한 이분법으로 <칠드런 액트>의 인물과 사건을 비난해서도 안 된다.


 불완전한 나와 당신을 위로하되 삶의 순간에서 더 나은 인간성을 찾아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한 사유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정답이 없는 인생에 대항하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비겁한 방식은 이분법이다. 하지만 확고한 결정과 빠른 해법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의심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인생보다 더 빈곤하고 얄팍할 것이다.


 당신을 포함한 누군가가, 고귀함을 위해 고뇌한다면 그는 최선을 논할 자격이 있다.


                                      -끝-








Down by the Salley Gardens

 

                   - William Butler Yeats : Pome -

 

 

Down by the salley gardens my love and I did meet;

She passed the salley gardens with little snow-white feet.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But I, being young and foolish, with her would not agree.

 

 

In a field by the river my love and I did stand,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She bid me take life easy, as the grass grows on the weirs;

But I was young and foolish, and now am full of tears.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 내 사랑과 나는 만났어요

그녀는 눈처럼 흰 작은 발로 버드나무 동산을 건넜지요

그녀는 나뭇잎 나무에서 자라듯 사랑을 느긋하게 하라 했지만

난 그때 젊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 믿으려 하지 않았지요

 

 

시냇가 어느 들녘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어요

그녀는 눈처럼 흰 손을 내 기울인 어깨에 얹었지요

그녀는 풀들이 둔덕에서 자라듯 인생을 느긋하게 살라 했지만

난 그때 젊고 어리석어 이제야 온통 눈물로 가득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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