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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Sep 18. 2022

철학과 종교 (건전한 종교성과 형이상학)

물이 바다 덮음같이…?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찬양이 있었다. 아마 유년시절에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찬양이리라 생각한다.

찬양의 제목은 <세상 모든 민족이(원제 : 물이 바다 덮음같이)>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이하 생략)


대부분 이 찬양을 좋아했다. 단조롭지만 감미로운 멜로디는 예배자의 영혼을 울리곤 했다. 어떤 목사님은 이 찬양을 연속으로 3번이나 부른 적도 있다. (물론 그런 경우는 종종 있다. 특히 부흥회 단골 찬양인 “내게 강 같은 평화”는 한 프레이즈가 5번 반복되는 게 기본이다. “내게 바다 같은 바다 같은 바다 같은 바다 같은 바다 같은 바다 같은 평화” 뭐 이런 식으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한 반복하며 성령의 충천을 의도하는 종교계의 방식”이 심리학적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품어서가 아니다. 반복된 노출로 하나의 어휘를 이미지로 치환하여 개인의 가치관에 각인시키는 것은 대부분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치가, 광고회사, 신문기자, 자기 계발 강사 등, 이런 분야의 전문가는 차고 넘친다. 그러니 “어휘(이미지)를 반복 사용하게(노출) 함으로써 그 어휘가 실재적이고 유효하다고 믿게 하는” 전략을 쓴다는 이유로 종교계만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주욱 궁금했던 것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이 가사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고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가사는 이 부분이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라는 이 찬양의 메인 레토릭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는다.라는 명제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물이 웅덩이(아주 큰)를 덮으면 바다가 된다, 라는 말은 아주 정당하다. 하지만 물이 바다를 덮는다라는 말은 이상하다. 애초에 바다의 구성요소가 물인데,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말은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강물”정도로 해석해도 말이 안 된다. 강물이 웅덩이를 덮으면 바다가 되니, 애초에 “강물이 바다를 덮음같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강물이 웅덩이를 덮음같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튼 말이 안 된다. 나는 사전을 찾아보았다.

 

 <바다의 사전적 정의 : 지구 위에서 육지를 제외한 부분으로 짠물이 괴어 하나로 이어진 넓고 큰 부분.>

 한자로도 <바다 해>의 부수자는 <물 수> 임을 확인한 후 주변에 물어대기 시작했다. 물음의 내용은 이런 식이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걸 알면 은혜가 더욱 충천할 것 같은데, 뜻도 모르고 부르자니 영 내키지가 않아서 말이야.


 친구들은 말했다. “그냥 물이 바다 덮는 거지” - 여기서 그냥은 모른다인데, 모른다고 말하는 게 두려운 사람은 점점 개소리를 해대니(프랭크퍼트가 쓰는 표현입니다. 공격적으로 느끼지 말길) 모르면 모른다고 해라. 그냥이라고 하지 말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건 일종의 비유야” - 그러니까 무슨 비유냐고요. 비유의 1차적 기능은 추상 개념의 의미 전달인데, 비유가 추상을 초월하고 있으니…


 결국 나는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고, 역시 나 혼자 어떻게든 이해해야지 라고 다짐하며 넘어가 보려 해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찬양 가사를 부르며 무언가를 느끼고 은혜 충천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어떤 느낌인지 파악할 수 있는 사람만이 종교인인가.

나처럼 이 가사만 보면 부당하게 몇 대 얻어맞는 듯한 사람은 적어도 ‘순전한’ 종교인은 될 수 없겠구나.’라고.


언젠가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는 순전한 무사유라고 말했다. 무사유가 파괴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사유는 능력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으로 연결되며, 이는 언젠가 타자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물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요한계시록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강해를 하는 것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가운데 믿음도 더욱 성장한다. 계시종교가 무리함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말을 그 뜻도 모르고 아멘아멘 하는 것> 무사유와, 그 <의미를 알고 이 개념은 초월(논증적 정당화 불가)의 영역이니 결단> 해야 하는구나,라고 무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과 바다만큼 다르다.




 건전한 종교성과 철학의 정신은 많이 닮아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나무아미타불”하는 것과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것과 그 의미도 모르고 “물이 바다 덮음같이”하는 것이 묘하게 닮지 않았는가.

 이런 논의도 건전하게 이루어지는 사회, 터부가 별로 없는 사회. 이게 바로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이 활성화되는 사회가 아닐까.



 (나쁜) 종교는 터부를 만들고, (좋은) 종교는 터부를 해체한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성령이 인도하는 곳에는 자유함이 따른다.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가진 의심 많은 크리스천은 순전한 무사유의 죄를 짓진 않을 것 같다.


 두 발을 땅에 딛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보길 바랐던 칸트와, 보지 않고 믿는 게 더 귀하다는 예수님은 초월의 개념으로 화해할 수 있다.

 철학도 종교도 도약과 신비와 초월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둘 모두 지혜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상한 종교는 이런 말만 한다. “그냥 믿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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