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따듯한 오후, 친구 집에서 놀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다.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감싸며, 바람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주변의 나무들은 잎사귀를 흔들며 여름의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하루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때, 갑자기 슬리퍼가 끊어졌다. 평화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오래된 오른쪽 슬리퍼의 갑피가 떨어졌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불안감이 밀려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심장은 마치 늦은 밤의 종소리처럼 요동쳤다. 왜 하필 이 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바닥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울음소리를 대변하는 듯했다. 집까지 남은 거리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그때, 근처의 미술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온 한 선생님이 나를 발견했다. 일면식도 없던 선생님은 나에게 다가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무슨 일인지 물어보셨다. 낯선 어른의 질문은 긴장의 끈을 풀어주었다. 나는 집까지 남은 거리를 설명하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이야기를 듣고는 미소를 지으며 학원에 들어가셔서 본드를 가져오셨다. 말없이 슬리퍼를 달라며 손짓하셨고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슬리퍼를 건넸다. 선생님은 슬리퍼를 정성스럽게 고쳐주셨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도 감사해서 잠시나마 내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본드가 마르는 동안 선생님은 미술학원에서 어떤 수업을 하는지,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슬리퍼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선생님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슬리퍼가 끊어진 상황 속에서 누군가의 작은 친절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깨달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슬픔은 사라지고 얼굴에 환한 미소만이 남아있었다. 그날의 작은 친절은 마음속에 따뜻한 불씨처럼 남아, 때때로 누군가의 손길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