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뿔난 토끼 Mar 16. 2021

한 걸음씩 서두르지 말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남편은 집 근처의 병원을 방문한 이후로  지팡이 없이  걸음마를 시작했다.

수술한 자리의 통증으로 똑바로 누운 자세로  잠도 못 자고 앉은 상태로 쪽잠을 자며 통증과 고스란히 맞서 싸우면서도  한 걸음씩 내디디며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남편의 걸음걸이는 보폭이 작고 느리기까지 했다.     

의지의 한국인.

남편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규칙적인 걷기 운동을 하며 췌장암 수술 후의 통증을 진통제 없이 오롯이  버텨나갔고, 걸을 때마다 복부의 통증이 밀려오는지  오만상을 찡그린 채 열심히 발을 떼는 남편은 말을 할 때조차도  숨 고르기를 하고 힘을 모아 가까스로 천천히 짧은 말을 내뱉었다.

남편의 목소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없었고,  아기가 처음 말을 시작할 때처럼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힘겨워했다.

그런 남편을 두고 주변에서는 더 이상 살기 힘들 것 같다는 소문이 남편의 느린 걸음마보다 몇 배는 더 빨리 주변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세상인심이란 참.     

어느 날 막연하게 아는 지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애기 많이 들었어요. 몇 번을 망설이다 전화했어요........ 수술은 했지만 회복이 안돼서  살기  힘들 것 같다면서요? "

"............"     

이런 전화를 받고 나면 어쩌면 상대방은 나를 위로해주고 싶어서 힘들게 전화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정작 전화를 받은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는  위로는커녕 마음속에서는 분노감부터  꿈틀거렸다.

우리 남편이 살기 힘들 것 같다고?

그걸 댁이 어떻게 알아요?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려있고 그건 하나님만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게임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왜 다들 빨리 끝내려고 하지? 아직 우린 시작도 안 해봤는데.

우리 남편은 이제 막 수술한 환자일 뿐이고,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왜 당신들 맘대로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 난리냐고.

태어나서 처음 받은 대수술이니 힘든 건 당연한 거지.

아기들도  제대로 발을 떼고 걷기 위해서는 이천 번을 넘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야 하는 과정이 있는 것을.

댁들도 자식 키워봐서 알잖아. 애들이 걷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지, 그리고 당신들 역시나 하나같이 이천 번 넘게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서 걷기 시작한 사람들인데 왜 그 과정은 생각 안 하고 무조건 남의 일이라고 포기부터 하고 난리야.

됐거든요.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위로조차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음이 다칠 때마다 나는 평소에 믿지도 않던 신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 매달리고 사정을 하게 된다.

하나님, 제 남편 좀  살려주세요.

더도 말고  팔십 살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남편에 대한 '품질보증서' 기한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만약에 얼마 안 남았다면  기간을 팔십까지만 좀 더 연장해주시고요, 확실하게 '생명연장 보증서' 같은 거라도 문서로 하나 만들어서 거기에  도장도 꽉 찍어서 발급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요!!!!!     

작가의 이전글 이제 시작인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