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앤 드래곤 : 도적들의 명예

클래식한 소재에서 새롭게 벼려낸 '네오' 클래식

by 제이크 킴

(영화를 본 이후의 리뷰이기 때문에, 본편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의 새 영화가 나온다며 예고편을 보았다.

무언가 너무나도 식상해 보이는 예고편에 '이 영화 별로겠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개봉하고, 주변 지인들로부터 생각보다 평이 좋아 당혹했다.


본인도 던전 앤 드래곤이라는 세계관을 조금 알고 있고, 나름의 추억이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리라 결심하고, 시청하고 왔다.

필자는 이 영화에서 90~200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의 질감을 느꼈다.

굉장히 익숙하고 예상할 수 있는 서사이지만, 그럼에도 지겹지 않게 느껴지는 이야기.

어떠한 제약이나 틀에 매이지 않고, 그냥 자유롭게 펼쳐지는 상상력과 이를 받춰주는 미장센과 비쥬얼.

(물론 본 영화를 미장센 측면에서 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판타지에선 호빗과 신비한 동물사전, SF에선 쥬라기월드나 터미네이터의 속편...

내가 너무 즐겁게 보고, 감동했던 이야기의 후속작들이 어린 시절 주었던 감동을 더 주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헐리우드가 잘하는 것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 영화는 굉장히 심플하게 제 갈 길을 간다.

1c5211905d7b75a382c5c126cd5f2cbffefda527 좌측부터 드루이드 도릭, 소서러 사이먼, 음유시인(바드) 에드긴, 바바리안 홀가

긍정적이며 유쾌하지만 어딘가 아픔을 품은 주인공 에드긴이, 과묵하지만 할 일은 하는 버디 홀가와 함께 떠난 일행이, 소심하고 징징거리지만 큰 일을 해내는 사이먼과, 시니컬하지만 출중한 능력과 미모를 갖춘 도릭을 영입하며 단합되어 악을 물리친다.


3줄로도 요약할 수 있는 심플한 이야기가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배우들의 호연으로 매력이 불어넣어진 인물들과, 시선이 집중되는 괴수들과 마법(CG)에 힘이 크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모험이라는 플롯이 인류사와 함께 해 온 유구한 '클래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요즈음 나오는 영화들 중에는 '기존 시리즈의 명성'이나 '정치적 올바름'만으로 호소하는 영화들이 왕왕 있다.

그 중 일부는 기존 시리즈를 잘 이어가거나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영화들도 있다.

난 감독들이 조금 더 자유롭게 영화를,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철저하게 내 입맛에 맞췄지만 내 눈치를 보며 꾸며낸 이야기보단, 내가 모르지만 공감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고 신선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이제 총평은 여기까지 마치고, 이 영화의 좋았던 점에 대해 쓰고자 한다.


1) 보편적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일행이 모험을 떠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인공 에드긴이 감옥에 가게 되며 동료에게 딸을 부탁했으나, 동료가 내 딸을 속여 자신과 이간질한 후 자기 딸로 키우려고 하는게 아닌가!

당연히 주인공은 아버지로서 딸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친구들은 이를 돕고 겸사겸사 재수 없는 영주도 한 방 먹여주고, 보물도 챙길 겸 모험을 떠난다.

급조된 일행들이니 생사를 함께 하며 정도 싹트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니 위기에 처하며 반목하게 되지만, 서로를 보듬어주며 함께 여행을 마무리한다.


2) 그러면서도 식상하지 않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다.

먼저 주인공 파티의 인종 구성을 보면, 파티의 리더이자 백인인 에드긴은 그 직업이 음유시인이라 여러 재치와 기지를 발휘하긴 하지만, 전투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실제 원작 던전&드래곤에선 음유시인도 사람에 따라 잘 싸우긴 하지만)


전투 시 주로 나서는 인물은 라틴계 전사인 홀가, 그리고 작고 나약해 보이는 여성인 도릭, 흑인인 사이먼이다.

기존 영웅 서사의 인물 구도와는 사뭇 다른 이런 멤버 구성이 (비록 요즘엔 이런 구성조차도 흔해졌지만) 클래식한 플롯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다.

a226b9ff17e4212251857fda0475fa15502e074e 찌질하다 못해 졸렬한 휴 그랜트라니...ㅋㅋㅋ

그리고 또 마음에 드는 것은 휴 그랜트가 연기한 로그(작중에선 사기꾼으로 번역됨)이자 영주인 포지.

그 젠틀하던 휴 그랜트가 소인배이자 찌질한 연기를 하는데, 심지어 잘한다!


그러니까 요는 백인 남성 영웅이 모든걸 해결하냐 아니냐가 아니다.

어떤 인물이 무슨짓을 하건,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3) 소재에 충실하다

이 영화 이전에 이미 2편의 던전&드래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던전&드래곤은 국내엔 생소할 수 있지만, 서양에선 서브컬쳐 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TRPG이자, 이를 기반으로 하는 IP 시리즈이다.

그러나 이전의 영화 중 하나는 원작을 철저히 무시한 망작이고, 다른 하나는 원작은 충실했지만 그냥 영화 자체가 망해버린 케이스이다.


이 영화는 던전&드래곤이라는 원작을 깔끔하게 반영했지만, 그럼에도 세계관 설명에 구구절절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인물과 사건을 흘려 보내면서 '아 그런갑다'하고 납득하게 풀어낸다.

특히 '디스플레이서 비스트' 같이 마이너한 몬스터가 나오는 데에선 조금 감동했다.

common.jpg 예고편에 뻔질나게 나오던 그 녀석이다

난 던전 앤 드래곤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90년대생인 나에겐 오락실 게임이 먼저 떠올랐다.

오락실엔 늘 무서운 형들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담배 피우고 삥 뜯는 그런 형들이.

각설하고, 그럼에도 나와 친구들은 오락실에 갔고 게임을 통해 일상과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인상깊게 기억하는 것이 바로 본 영화와 동명의 게임, 던전 앤 드래곤이다.

왜냐면 그 게임은 4명이 동시에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게임이라, 늘 게임 깨나 하는 형들이 붙잡고 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d&dsom.jpg 90년대 생이라면 대부분 알리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선망의 게임이었던만큼, 이 세계관에 난 금방 빠져들었고 지금까지도 좋아하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도 이미 오래 된 세계관이었고, 엘프나 용이 나오는 이야기라면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인가?

그러나 지금 시대에도 판타지 이야기가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었다.


신나서 글을 쓰다보니 조금 옆으로 샌 감이 있는데, 이야기를 정리해보겠다.

영화계 분들이시여, 부디 '새로운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고, 기존에 있는 이야기들을 '잘' 쓰기만 하여도 대중들은 즐겁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은 꼭 어렵고 현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히 가족적이고 유쾌한 활극도 좋아라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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