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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Oct 04. 2023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을 지나(제주 2일 차)

자구리, 정방폭포, 허니문하우스를 가다

아침에 서귀포 하영올레 1코스를 트레킹 하기로 했다. 하영올레의 '하영'은 제주의 방언으로 많다는 뜻이고 올레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의미한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몸소 하영올레 초입까지 안내를 해주는 친절을 베푼다. 


얼마를 걸었을까. 시야에는 작가의 산책길 이정표가 펼쳐졌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길이었다. 가끔 작가라는 말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작가의 무게가 너무나 다르고 내 무게 역시 새털처럼 가볍기 때문이다. 


처음에 만난 작가의 작품은 이승택의 제주 돌담이었다. 담장 중의 백미는 바로 돌담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비싼 인공 담을 쌓아도 돌담의 아우라를 따라가지 못하는 연유는 켜켜한 세월이 함께한 뒤안길로 돌담만이 갖고 있는 그 깊은 미학 때문일 게다. 돌담길을 걸을 때면 나는 고향의 둥구나무 같은 정겨움과 고향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편안함과 조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의 창작길 이정표가 나왔다. 이중섭미술관에서 출발해서 정방폭포를 지나 '소라의 성'까지 이어지는 4.9km 코스였다. 이 이정표를 보는 순간 당초 계획을 다시 수정하여 작가의 산책길로 변경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늘 인생은 이렇게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같다. 


작가의 산책길 중간중간에는 시인의 시비가 조각되어 있었다. 김춘수, 정지용, 이생진 시인의 작품도 있었다.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1차적으로 서귀포와 관련된 시를 대상으로 선별했고 두 번째는 작고한 시인을 대상으로 시를 선정했다고 한다. 16편의 시비 중  중 제주 시인의 시비는 2기뿐이라고 한다. 


시비공원을 지나자 아스라이 천지연폭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왔다. 전망대에서 천지연폭포를 굽어보았다. 산세 좋은 곳에 위용한 자태로 도도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전신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얼마를 걷자 자구리 해안이 나온다. 마치 이국땅에 와 있는 것 같다. 야자수처럼 보이는 바다 뒤로 농밀한 섶섬이 아스라이 보인다.  


갯바위 옆으로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햇살은 바다에 직선으로 꽂히고 있었고 바다가  다시 하늘로 그것을 되쏠 때 은빛 여울이 일었다. 저 멀리 주상절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멀거니 비켜서서 무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구리 담수욕장에 도착했다. 좌측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있는 곳이 바로 민물인 자구리 담수욕장이다. 자세히 보면 아가씨는 해수욕을 즐기는 친구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고 있다. 도로 위에는 원주민으로 보이는 초로의 노인이 아가씨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 혀를 차고 있었다. 


노인은 자구리 바다의 소가 깊어 마을 사람들도 해수욕을 하지 않는 곳이라면서 수영도 서투른 아가씨가 겁 없이 들어가서 수영을 한다며 위태위태 바라보는데 수심이 가득한 그 얼굴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소가 있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내가 내려가자 다행히 해수욕을 하는 아가씨가 갯바위로 올라왔다. 이십 대 중반인 아가씨는 상의에 검은 브라를 걸치고 있었고 하의는 하얀색 실크 바지를 입었는데 얇은 데다가 물에 젖어 꽃무늬 팬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아가씨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담수욕장은 유리알처럼 투명해서 눈이 시리다. 신발과 양발을 벗고 나는 담수욕장에 들어간다.  균질한 햇살이 물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내 발에 부서진다. 피라미 몇 마리 내 발뒤꿈치 아래로 꼬리 흔들며 다가와 사물거린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피라미는 이 차가운 물살을 어떻게 견딜까. 나는 금세 발이 시려와 몸서리치고 있었다.  


담수욕장 바닥을 본다. 바닷물과 경계를 이룬 담수욕장에는 많은 피라미들이 꼬리 흔들며 나아간다.  해수와 담수가 어깨를 걸고 있는 자구리 담수욕장. 조금이라도 파도가 일면 해수가 담수를 덮질 것 같았다. 하지만 피라미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유유자적 유영하고 있었다.  


자구리 해수욕장을 지나면 바로 우측에 고궁 같은 서복전시관이 보였다. 어떠한 이유인지 올 5월부터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젊어서 나는 영어보다도 한자를 좋아했다. 사서삼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세월은 망각이라는 은총의 잔만을 베풀어준다고 하던가. 지금은 한자를 읽는 해독력이 많이 떨어졌다. 부끄럽지만 서복전시관을 한자를 보고 여복전시관으로 오독했다. 


서복전시관을 들어서면 진시황이 탄 마차를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청동마차 디오라마를 볼 수 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지만 건강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결국 불로장생을 꿈꾸었다. 그때 신하였던 서복이 동쪽나라 영주(제주도)에 가면 영산(한라산)이 있는데 그곳에 불로초가 있다고 꾀를 내서 말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해오라며 서복에게 동남동녀 각 500명과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대선단을 내려 주었다.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영주의 제 일경인 정방폭포에 내렸다. 영산인 한라산을 뒤졌지만 불로초를 찾지 못했다. 다행히 회귀약초를 찾았다. 그는 정방폭포를 떠나면서 암벽에 '서불과지'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서쪽으로 갔다. 서귀포의 지명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서복이 제주에 내리던 장면을 디오라마로 전시해 놓은 장면이다. 


아래는 정방폭포포가 떨어지는 절벽 위다. 저 밑으로 20여 미터 거센 물줄기가 떨어져 거대한 폭포를 형성한다. 사람들은 이를 정방폭포라고 부른다. 계곡 위로 이름 모를 감귤색 꽃이 환하게 피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계곡이 있는 초록 위에 주홍빛을 켜든 오묘한 꽃이 피어 경이로움을 더한다.  

                    

정방폭포에서 조그만 걸어 들어가면 소정방폭포가 나온다. 소정방폭포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정방폭포와는 또 다른 비경이다. 주상절리와의 조화가 영화롭다. 관광객들이 많이 놓치는 폭포가 소정방폭포다. 제주에 오면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 중의 하나가 소정방폭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니문하우스 카페다.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 별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허니문 하우스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별장으로 사용했을까. 그 누구는 제주에 가면 제일 먼저 허니문하우스를 가보겠다고 했다. 이곳은 바다와 섬. 아름드리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로운 극치를 조형하고 있었다. 정작 조물주의 걸작이 이곳에 있었다.  


이렇게 멋진 풍광 앞에서는 마시는 맥주는 어떤 맛일까. 제주맥주 한 병에 빵 한 조각을 주문했다. 맥주에다가 바다를 섞는다. 농도 짙은 햇살을 레시피를 공짜로 넣는다. 맥주 한 컵에 만원.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거기에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멋진 풍광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카페를 나와 다시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스라이 칼 호텔이 펼쳐진다. 흐르는 물에 물레방아가 혼자 돌고 있었다. 이 둘레길은 노약자와 안전에 대비하기 위해 칼호텔에서 무상으로 개방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직접 실천하는 칼호텔이 고마웠다. 


저녁을 먹기 위해 매일올레시장을 찾았다. 오늘은 올레수산회센타에서 독가시치 회를 떴다. 사장님은 수족관에서 물고기를 떠서 보여주며 이렇게 큰 자연산 독가시치는 보기 힘들다고 했다. 내가 봐도 제법 컸다. 붉은 회로 떠져 테이블에 올라왔다. 혼자 먹기에 너무 많은 양이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그에 반해 남자의 목소리는 모기소리 침잠되어 있었다. 귀 기울여보면 남자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다시 합치자고 했고 여자는 사업을 다 말아먹은 당신한테 가서 내가 또다시 종처럼 살아야 되겠냐며 기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남편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는 모습을 보면 여자도 다시 합치는데 마음이 있어 보인다. 그렇치 않고서는 술잔을 부딪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자가 게거품을 물면서 저항하는 것은 사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일종의 포석처럼 보였다.  


옆에는 오십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다. 전어회를 상추에 싸서 소주를 마신다. 나보다 늦게 식당에 들어왔는데도 술 마시는 속도는 빨랐다. 테이블 사이로 나와 마주 보고 있다 보니까 자꾸 눈이 부딪친다. 그때마다 서로가 시선을 돌린다. 저 여자는 어떤 사연을 안고 제주에 왔을까. 


횟집을 나와 편의점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캔맥주를 딴다. 야시장에서 불판에 구운 작은 랍스터 한 마리를 안주삼아 한 모금 들이킨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니 제사상에 랍스터를 올리고 있다. 주자십회에 보면 不孝父母死後悔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회한다는 말이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나타나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맥주를 들이켠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적신다. 숙소에도 시원한 맥주가 있지만 내가 이렇게 편의점 맥주를 고집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편의점에 앉으면 지나가는 행인의 천태만상을 직접 목도할 수 있고 옆 테이블의 잔잔한 군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숙소에 들어온 시간은 정확히 8시 30분이었다. 황저우 아시안컵 16강전을 방송하고 있었다. 키르기스스탄전이었다. 젊어서 축구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국가대표 대항전 축구방송을 좋아한다.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불행한 세대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어쩌면 축구에 광적이다.  


키르기스스탄전에서 우리나라가 5대 1로 이겼다. 이강인은 재치가 번득였고 엄원상은 빠르게 질주했다. 축구중계가 끝나자 테이블 위에는 비워낸 아사이 캔맥주 2개가 널브러져 쓰러져 있었다. 나도 캔맥주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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