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4월은 잔인한 달이라 생각했었다. 그 잔인하게 생각되던 4월의 모든 기억들이 2014년 4월 16일을 기점으로 수그러들었다.
벌써 10년 전인가?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키고 난 후,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은 하루 일과 중 가장 짜릿한 시간이다. 학부모들은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자녀들 뒷모습을 보며 서성이다 마주치는 몇몇 엄마들끼리 눈을 깜빡인다. 학교 앞 분식집에 들어가 믹스커피 한잔 하자는 신호다. 학부모가 운영하는 학교 앞 분식집은 '참새와 방앗간'처럼 엄마들의 쉼터다. 엄마들은 주머니에 담아 온 믹스 커피를 꺼내어 종이컵에 따라 마시며 온갖 수다를 한다.
분식집은 금세 여기저기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은 엄마들로 채워진다.
2014년 4월 16일
그날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분식집 텔레비전에 얼핏 지나가는 뉴스를 보며 엄마들은 수다에 잠깐 뉴스 이야기를 섞었다.
"수학여행 가다 뭔 난리? 학부모들 깜놀했겠네...쯔쯧... 그래도 모두 무사하다니 천만다행이야!"
뉴스 자막에 나타난 "전원 구조되었다"는 짤막한 문구가 안도의 숨을 쉬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왁자지껄하던 분식집은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엄마들의 화제는 온통 세월호 이야기였고 이야기하다 철철 흐르는 눈물은 엄마들 모두에게 아픔을 경험케 했다.
해가 떠서 석양으로 기울듯 세월호는 45도 기운 상태에서 90도, 100도, 바다에 정말 침몰하기까지의 시간은 꽤나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으로 기울어가는 세월호는 구제되지 못했고 타들어가는 가슴으로 희생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때 우리 첫째 아이가 중1, 둘째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아이도 엄마 아빠도 눈물을 찔금거리던 날이 여러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누나 형들의 희생이 마치 자신들의 경험처럼 아프다는 말을 두 자녀들이 동시적으로 이야기했었다. 물론 나에게도 동일한 감정이었다. 혹시나 지인들의 자녀가 포함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있었다. 몇몇 학부모들은 절규하는 자녀들을 데리고 목포 팽목항으로 추모하러 다녀오기도 했다. 우울한 감정이 지속되자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다독이며 어떻게든 아픈 기억에서 헤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희생자 유가족의 슬픔에는 비길 수 없지만 일상의 생활이 무너진듯한 나날이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충격과 아픔, 트라우마, 깊은 상처의 기억들이 시간과 함께 잊히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한 아픔의 기억으로 잊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식과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희생자는 있는데 희생을 방관한 책임자들은 숨어버리고 존재하지 않는다. 10년 전 그 순간, 대한민국은 정치공백상태였다.
원인규명도, 사건과정도, 긴급히 희생자를 구해내지 못한 책임자 처벌에 대해서도 여전히 미궁상태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아파트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자동차에 탄 채로 잠시 스마트폰 검색 중에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꽝 소리가 울리면서 내 몸이 흔들거렸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니 앞쪽에 있던 차량이 무대책으로 후진해 와서는 내 차를 박은 것이다. 운전자는 자신의 명함을 주고는 급히 다녀와서 연락하겠다고 하더니 휙 가버렸다. 그 후로 나는 흠집난 곳을 닦아내며 연락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가 다 지날 때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연락을 해도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나는 1~2일 동안 안절부절못하며 뺑소니로 신고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다음날 연락이 왔다. 나는 보험 처리해 달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자신의 형편을 구구절절이 하소연하더니 합의금을 줄 테니 해결해 달라고 했다. 아내의 차량을 아내 몰래 타려다가 사달이 났고 현재 아내와는 사이가 안 좋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만 봐달라고 싹싹 비는데 마음 약한 나는 30만 원에 합의를 해주었다. 흠집난 뒷좌석 오른쪽 문을 교체하려면 렌털 요금까지 합하면 100만 원가량은 소요될 것이었다. 상대방의 동정심 유발로 인해 나는 아직도 흠집난 차량을 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이젠 더는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는다. 사건이 마무리되었기에 가끔 속상한 생각이 들어도 다시 사건을 들추고 싶진 않다.
10년 전 기억이 잊히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때의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대로 세월호 사건이 10년이 흘러도, 아니 20년이 흘러도 모든 의문점들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416 세월호는 우리의 기억에서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전국민적 아픔으로 남겨질 한 맺힌 상처의 기억들이 속히 아물게 되기를 희망한다. 기울어가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건져낼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 시간을 허비한 까닭이 무엇이었나? 그 아무리 중한 일이 있다한들 뭍 생명보다 더 중할까? 자신의 신념이 아무리 중하다고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른 채 떠나간 어린 목숨보다 더 중하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