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흰샘]
매월당 김시습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이다. 사실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라 해야 더 맞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우리나라 본격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문학적 특장처는 시에 있다. 남아있는 시만도 2천수가 넘는데, 그가 거의 일생을 떠돌아다닌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지은 시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김시습의 일생은 ‘떠돌이’로 치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조선 팔도를 두루 떠돌아다녔다. 마음의 정처(定處)가 없으니 몸의 정처도 없었다. 아울러 사상의 정처도 없었다. 여러 번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가 다시 나와 선비가 되었다. 나의 스승 임형택 선생은 그런 그를 ‘방외인(方外人)’이라는 인간상으로 특정하셨다. 세상이 정해 놓은 규범 밖을 떠도는 사람이라는 의미 정도가 될 것이다.
김시습이 떠돌다 머문 곳 가운데 청평사도 있었다. 이 詩 외에는 청평사에 김시습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다. 김시습은 아마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청평사를 방문했나 보다. ‘새 우짖는 외론 탑’은 분명 고려선원 안에 있는 삼층석탑을 가리킬 것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탑이다. 그 아래로 ‘낙화 띄운 냇물’이 흐른다.
내가 청평사를 찾은 날은 아직 봄이 익지 않아 새와 꽃은 볼 수 없었지만, ‘고요한 석탑’과 ‘흐르는’ 냇물은 변함이 없었다. 경칩을 하루 지낸 날, 영지(影池)에선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짝을 찾는 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왔다.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었지만, 개구리는 이미 봄인 줄 알고 봄을 부르고 있었다. 굳이 ‘한시름’이라 할 시름도 내겐 없지만, 그래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나누기도 하고 연결하기도 하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 청평사에 들어갈 때는 매월당이 노래한 그 ‘신선이 사는 골짝’으로 한발 다가서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