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김민철 작가의 파리 산문집<< 무정형의 삶>>을 읽고 있다. 책은 20년 동안 다녔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두 달 동안 파리에서 머물렀던 이야기를 그렸다. 몰랐던 사이가 친구가 될 때 마음을 천천히 내보이듯 파리가 다가온다.
10여 년 전 유럽 배낭여행 때, 파리에 가서 처음 에펠탑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일일 가이드 투어로 파리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유명한 성당에도 갔고, 거리 화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샹들리에 골목도 다녔다. 가이드가 사준 빵집에서 갓 구운 바게트를 맛보기도 했다. 그 담백하고 따뜻한 빵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여러 건물들을 지나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가이드가 고개를왼편으로 천천히 돌려보라고 한다.
- 우아!
- 여기 이렇게 에펠탑을 쉽게 볼 수 있는 거야?
거대한 철재 구조물이 떡 하니 서 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상태에선 탑의 일부만 보였다. 마치 소인국 나라에서 온 내가 거인을 마주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보게 된 에펠탑, 그래도 처음 본 감동의 순간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회사 다니며 바쁠 때 간 여행이라 사전 준비를 잘하지 못했다. 다시 간다면, 여행의 목적을 정해서 준비를 많이 하고 갈 것 같다. 지난 학기에 서양 미술사를 공부했는데, 인상파 화가 모네의 작품이 기억에 남아 그 그림들을 볼 수 있는 미술관에 가보고 싶다 - 모네의 작품이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마르모탕 미술관. 또, 지베르니의 '모네의 정원'에 가서 그의 작품 속 연못, 연꽃, 수면을 직접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모네는 루앙 대성당을 30점 이상의 연작으로 그렸다. 그중 6점을 한 자리에서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시간에 따라 색을 달리해 같은 성당이라도 다르게 보였다. 붉은, 흰, 노란, 베이지, 회색, 파란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 빛을 포착하려고 얼마나 빠르게 집중해서 그렸을까. 그렇게 여러 점으로 연작해서 그린 이유는 뭘까.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 시간을 따라서 변하는 성당을 보라.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까!
6점의 성당 그림을 보니 마치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병들고, 쇠퇴해 가는 모습들이 겹쳐진다. 그렇다. 모든 것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한다. 예전의 건강했던 엄마도, 내 모습과 생각도, 인간 관계도,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이 변했고, 변하고 있다. 그리고 변할 것이다. 그런 인생의 모습을 그림은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흘러가버린, 변한 것들은 내가 어찌할 수가 없다. 나는 어떻게 변하면 좋을까에 맞추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 일상에서도 특별한 것을 발견하고 낮은 곳을 보며 작고 연약한 것들의 속삭임을 듣는 시인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싶다.
책에 파리에서 에펠탑을 극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부분이 있다. 포르투갈 시인 카몽이스의 흉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그 계단을 다 올라 마침내 뒤돌아선다. 그러면 건물들 사이로 센 강이 보이고, 그 뒤로 에펠탑이 보인다. 어떤 극적인 만남일지 상상이 되지 않아 직접 확인하고픈 마음이 든다.
스무 살 때 파리에 첫눈에 반한 작가는 그때 우연히 퐁피두 센터 2층의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파리를 마음에 담았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일생의 꿈이 된 그 후 몇 번 파리에 갔지만, 22년을 그리워하다 이번엔 두 달을 살러 갔다.
퐁피두 센터는 작년에 읽었던 책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에서도 인상적인 건축물로 남아 있다. 건물 안에는 기둥이 없다. 미술 전시 공간에 걸림이 없도록 한다는 취지에서다. 대신 건물 밖에 건물의 모든 구조체가 보인다. 상수도관 파이프들은 녹색, 공기 순환 공조 덕트는 파란색, 전기선은 노란색으로 나와 있다. 사람들에게 넓은 공간을 주려고 배려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국민이 사랑하는 현대 건축물 2순위에 들었다.
그 센터 미술관에 화가 '조르주 루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표작 중 하나가 <미제레레>라는 작품인데, 루오가 제1차 세계대전 중 그린 드로잉을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요청으로 동판화로 옮겼다. 작품 제목 <미제레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으로, 전쟁의 비참함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담았다. 루오는 인간의 소중함을 그렸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연민으로 바라보았다고 평가받는다. 루오의 작품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예술가로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아름답다. 숭고한 내면을 지닌 그의 작품을 좀 더 찾아봐야겠다. 파리에 갈 때 가고 싶은 곳 목록에 퐁피두 센터를 넣었다.
책으로 파리 여행 중반을 달리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이 아껴먹고 싶은 빵처럼 남았다. 천천히 내딛으며 가야겠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쯤 나는 무엇을 더 보고 들으며 어떤 것을 느낄까? 잠시 쉬었으니 다시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