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대변 이야기를 해야 하니 양해를 구한다. 마지막으로 똥 눈 것이 기억나시는가? 그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시는가? 나는 당신이 화장실에서 문을 닫고 홀로 조용히 배변했기를 바란다. 생전 똥 안 누는 사람인 척 고상을 떨 필요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배변 과정이 개인적이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그 정도는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니까.
반면에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갔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림이 좀 다르다. 우리 아기가 뭔가 또 칭얼대고 나를 찾는 탓에 바지를 내린 채로 엉거주춤하게 아기를 안고 변기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휴. 한숨이 나지만 애 낳은 이후로 어쩔 수 없다. 내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저저저 철없는 아줌마가 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책맞은 얘기를 하네. 애랑 같이 똥 싸는 게 뭔 자랑이라고...
자랑하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삶은 우리가 '당연한 권리'라고 간주하는 것들과 때때로 충돌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다. 나도 나만의 방이나 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애는 내가 있는 모든 공간에 쳐들어온다. 나도 주 40시간 근무하고, 야근하면 초과 수당 받고 싶다. 우리 애는 그딴 것 모른다. 임신도, 자연 분만도, 모유 수유를 할 때도 가능만 하다면 남편과 반반씩 하고 싶었다. 쩝, 택도 없는 바람이다.
인류는 개인에게 보장된 권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진일보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개인성, 자율성, 독자성에는 재생산의 근본적 성질과 얼마간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짝을 맺고 2세를 낳는 일에는 상호 간 양보가 필연적이고, 철저히 논리적인 방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육체적 부담을 반반씩 나눌 수도 없고,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예측하는 것은 들어맞지도 않는다. 임신을 하면 내 몸뚱아리를 타인과 완전히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누려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확장될수록, 하필이면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기원으로부터 우리의 정신세계가 동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과학 문명사회로 이룩한 예측도와 통제성이 높아질수록, 육아는 더욱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일이 된다. 우리나라가 특출 나게 유난스럽긴 하지만, 다른 나라들도 차츰 저출산 현상을 겪고 있다. 아마 사회가 더 고도화될수록 저출산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문명을 퇴보시킬 수도 없고, 출산의 속성을 갑자기 뒤집을 수도 없다. 여성 인권을 후퇴시키거나, 문맹률이 높아지면 출산율이 증가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이 있다. 그 결과는 맞을지언정,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국가 주도의 온갖 출산 장려 캠페인은 젊은이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다. 피임을 못 하도록 자유를 억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아무 방법이 없는 것일까? 정녕 우리는 이대로 한국인 절멸의 시대를 맞아야 할까?
유효한 방법이 있다. 지금부터는 나에게 익숙한 병원의 용어를 빌려 오겠다. 첫 번째는 '설명과 동의'이다. 입원 치료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병원에서 복잡한 양식의 '동의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투자를 할 때도 온갖 서류에 사인을 해야 되는 것처럼, 이런 문서에는 온갖 악결과가 발생할 수 있음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종이뭉치에 동의하다 보면 환자 입장에서 다소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다. 치료 중에 이러저러한 부작용이 생겨도, 의사가 책임을 안 진다는 면피 증명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생 가능한 부작용에 대해서 고지하는 것의 더 중요한 목적은, 그 치료의 순응도와 환자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 주사는 아플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좋아질 겁니다.' '이 치료는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할 수도 있어요.' '이 시술을 받고 나면 간혹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것이 있어요.' 이런 정보를 미리 알고서 환자가 능동적으로 치료에 참여하는 것과, 기계적이고 피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치료의 효과나 과정이 현저히 다르다.
주사가 아플 것이라는 정보가 입력된다면 그것이 '새로운 규칙'이 되기 때문에, 통증을 예상한 입장에서 보다 수월히 견딜 수 있다. (간혹 가다가 그 정보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하는 환자도 있지만, 고지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은 예측 불가능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예측과 통제 가능한 범위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재생산은 유독 베일에 쌓여 감춰진 이야기가 많아서 '설명과 동의'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임신과 출산에도 솔직하고 풍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출산의 배신』을 쓰게 되었다. 이제는 동류의 담론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고 있다.
어때, 지금까지 농구 재미있었니? 우리 이제부터는 축구를 할 거야 축구를 할 때는 손으로 공을 만지면 안 돼. 그게 농구와 다른, 축구의 규칙이거든.
-재생산에 돌입한다는 것은, 새로운 규칙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근치 치료'이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에 걸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고열과 인후통 때문에 몹시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증상들 때문에 우리는 해열제나 진통소염제를 복용한다. 이 약들이 열과 통증 같은 증상을 완화시켜 줄 것이다. 그런데, 해열제나 진통제가 감염의 실제 원인인 '코로나 바이러스'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지는 않는다. 이런 접근을 '대증 치료'라고 부른다. 증상에 대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근치 치료'는 피상적 현상이 아닌, 근본적 원인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저출산 대책도 대증 치료와 근치 치료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사교육비 부담은 많은 사람이 꼽는 저출산 원인이라 예로 들어보겠다. 정부에서 사교육비 부담 완화를 위해, 부모들에게 '사교육비 지원금'을 나눠준다면 어떨까? 대증 치료일까, 근치 치료일까? 대증 치료에 불과하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녀의 적합도 상승을 위한 서열 경쟁에 뛰어든 부모는 이미 그 목표에 최대치의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는 중이다. 그 와중에 자원의 양을 증가시킨다면, 그저 사교육비의 총량이 증가할 뿐이다. 경쟁 완화와는 아무 소용없기 때문에 근치 치료가 아닌 것이다.
반면 어떤 것들이 근치 치료에 가까운지 생각해보자. 출산 휴직과 복직을 보장하는 제도는, 출산으로부터 파생하는 경제적 불확실성을 줄여 주는 효용이 있을 것이다. 아빠의 육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은, 엄마가 혼자만 재생산을 전담한다는 불공정의 감각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과 노인을 비롯하여 약자를 두루 배려하면, 재생산 시기의 육체적 취약성을 보다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소소한 예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나는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이것이 나에게 평소에 부족한 통제의 감각을 보상해주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활자는 참으로 갸륵하게도, 내가 적는 그대로 글이 된다! 우리 아기와는 무척 다른 점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생물학을 중심으로 인간의 속성과 그에서 기원하는 저출산 요소들을 살펴보았다. 물론 내 주장이 실용적이지 않다든지, 뜬구름 잡는 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탐구야말로 근치적 치료를 가능하게 해주는 배경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젊은이들이 삶에서 체감하는 경쟁 밀도를 완화해 주고, 취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고, 지나친 불안과 통제욕을 낮출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면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시공간 축에서 확장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에 호응하게끔 되어 있다. 설령 애를 안 낳은 들 어떤가. 사회 구성원들이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에서 그 미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