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는 두산 베어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왜 하필 두산팬이 되었느냐는 물음을 종종 받곤 했는데,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다. 아빠가 오비 베어스 어린이 회원에 가입시켜줬다고. 엄마와 수원 화성에 소풍을 갔다가 찍힌, 오비 베어스 '잠바'를 입고 있는 내 사진을 바탕으로 추정해보자면 때는 1989년. 당시엔 별도 비용 없이 이름만 적고 가도 어린이 회원에 가입 후 오비 베어스 어린이용 '잠바'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야구장은 아주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뿐이다. 공사를 하기 전 지저분했던 잠실 야구장의 가파른 시멘트 계단.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 야구를 봤고, 종종 술 먹은 아저씨들도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 아빠가 목말을 태워줬던 것 같기도 하다. 오비 베어스 잠바를 나는 아빠가 나를 사랑했던 증거로 기억했다.
열아홉 아니면 스물 즈음. 공장에서 쇠를 깎는 일을 하던 어린 노동자인 아빠는 휴일이면 동대문야구장에 갔다. 아빠가 살던 안양부터 동대문까지 그 먼 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부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대문 앞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말아먹고 신문지를 깔고 시멘트 바닥에 앉은 채 밥도 거르고 세 게임씩 야구를 봤다.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야구에 빠져 신이 나서 하루 종일 야구를 봤다고 한다.
아빠는 아빠의 영웅들을 기억한다. 김재박. 류중일. 장효조. 두산 베어스 포수 장승현의 아버지인 장광호를 기억하고, 동년배인 유두열의 죽음을 기억한다. 아빠는 자주 아빠가 알던 야구선수의 생사에 대해 묻는다. 그 사람 요즘 뭐 해? 살아있어? 이제 아빠가 아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어버이날이라 당산에 가 엄마, 아빠와 함께 소고기를 먹었다. 아빠의 엄마, 할머니는 아빠가 열 살 때 돌아가셨다. 마흔여덟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아빠의 가슴에 평생 자리하고 있다.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 갑자기 아빠가 눈물을 닦았다.
"엄마랑 이런 거 못 먹어봐서 그래?"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그때 열 살 어린이였다고. 아빠는 효도 같은 걸 할 수 없는 나이였다고. 아빠는 할머니의 막내아들이다. 아빠는 곧 눈물을 닦았다.
아빠와 나는 자주 야구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는 1대 0으로 끝나는 야구. 이런 야구가 가장 재미있는 야구라고 아빠는 늘 말했다. 투수가 다음 공을 어떻게 던져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를 미리 상상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는 잠실 야구장 네이비석 중앙 중단이다. 아빠는 그곳에서 꼭 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집중한 채 야구를 본다. (아빠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1대 0 경기 다음으로 아빠가 좋아하는 경기는 연장전을 하는 경기다. 진행 시간이 네 시간이 넘어가면 아빠는 무척 즐거워한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는 것이다.
아빠는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한다. 아빠가 태어난 곳이 부산이기 때문이다. 아빠와 나는, 혹은 우리 가족은 롯데 자이언츠의 잠실 원정 경기를 자주 보러 갔다. 코로나 이전의 세계 그 어느 날엔 퇴근하고 온 아빠와 퇴근하고 온 내가 평일 저녁 잠실 야구장 상단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롯데의 타선이 불을 뿜었고, 네이비석 상단에 돗자리를 펴고 야구를 보는 아저씨들이 신이 나서 소주를 마셨다. 그들은 일제히 부산 갈매기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는 입모양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자가 정확히 맞지 않는 박수를 쳤다. 아빠의 그 손뼉 치는 모습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5월 8일 10위 롯데 자이언츠는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만났다. 3대 0으로 이기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가 오재일의 홈런과 함께 7대 3으로 리드를 내준 순간, 아빠는 또 잔뜩 비관적인 사람이 되었다. 롯데는 꼴찌야. 롯데는 못할 거야. 롯데는 끝났어. 어찌어찌 롯데는 7대 6으로 점수차를 좁혔다. 그리고 8회 말, 김상수의 쐐기타로 8대 6으로 점수차가 벌어졌다. 아빠는 또 잔뜩 상심했다.
"오승환이잖아. 이제 끝났어. 롯데는 안 돼."
"아빠 몰라. 오승환 방어율이 별로 안 좋아."
"롯데는..."
그러면서도 아빠는 중계방송을 끄지 못했다.
어버이날 롯데의 9회는 치열했다. 나는 반쯤은 아빠를 놀리는 마음으로 "롯데 자이언츠가 어버이날이니까 우리 아빠한테 효도했으면 좋겠다!" 하면서 롯데를 응원했다. 아빠는 좋아하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중계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차도의 적시타, 이대호의 포수 등판. 아빠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세 번이나 돌려 보았다.
"일 년에 이런 경기는 한 번 있을까 말까 해."
아빠는 중계를 끝까지 본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내게도 오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어버이날이 될 것이다.
2014년 어버이날 나는 미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LA 다저스 경기를 직관하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여권을 검사하는 검역 직원이 내게 "Are you shy?"하고 물었다. 영문을 모른 채 나는 "예, a little..." 하고 한국말을 섞어 얼버무렸다. 그는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happy birthday!"
그제야 나는 기억해냈다. 여권에 적힌 내 서류상 생일이 5월 8일이라는 것. 꼭 호적이 있는 춘천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한다고 우긴 아빠의 고집 때문에 출생신고가 늦어져 생일이 한 달 뒤로 밀린 것이었다. 나는 그 생일 축하해, 라는 말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하루 휴가를 내고 무궁화호 기차에 올라 안양에서 춘천까지 가서 출생신고를 했을 스물아홉의 아빠를.
내가 가본 메이저리그 야구장은 뉴욕, LA,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구장이다. 아빠는 늘 메이저리그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아빠가 갈 수 있을까. 아빠는 얼마 전 이석증 진단을 받았다. 아빠의 이석증은 비행기를 타면 영향을 받는다. (총 세 번의 여행과 비행과 두통과 구토 끝에 우리는 아빠의 두통의 원인이 비행기임을 겨우 알아챘다.) 아빠는 이제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언젠가 꼭 아빠와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야구를 보고 싶다.
아빠는 '태를 물고' 태어난 아이였다. 오른쪽 귀 침샘 옆이 부푼 채로 태어났다. 정식 병명 같은 건 확인할 수 없지만, 아빠의 어릴 때 사진을 본 엄마는 오른쪽 입가가 확연하게 부풀어있는 아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아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침샘이 있는 오른쪽 얼굴을 접합하는 수술을 받았다.
"아빠, 할머니는 아빠 수술한 다음 얼굴을 못 봤겠다."
"그렇지. 이건 열두 살 땐가 한 수술이니까."
할머니가 아빠를 못 알아보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무척 사랑한 쌍둥이 막내아들을 반드시 알아볼 수 있겠지, 생각한다. 이대호의 포수 수비를 몇 번이나 돌려보던 아빠는 깊게 잠들었다. 오늘은 아직 어버이날. 아빠의 꿈에 꼭 할머니가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