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니를 잃어버렸다. 이빨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나 스스로도 황당한 사실이지만 내 왼쪽 어금니 제일 아래에서 십여년 간 저작을 도와주던 금 조각은 이미 내 곁에 없다. 이번 주 월요일. 잇몸 치료를 위해 병원 의자에 누웠다. 담당자가 내게 말했다.
"금으로 때우셨던 거죠? 치아에 금이 없는데..."
"네?"
거울을 보니 정말 없었다. 어금니 위를 가느다랗게, 마티스의 그림 <폴리네시아 바다> (커버 사진을 올린 이유)의 해초처럼 원 치아를 덮고 있던 노란 금 조각. 치아 탈락은 흔한 일이라고 하지만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보통은 빠지면 알아채지 않나? 잇몸치료를 하며 누군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내 금니가 어디로 갔는지 영영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왼쪽 아래 어금니까지 들여다보면서 살 정도로 삶이 여유롭진 않으니까. 검색해보니 삼켜버린 금은 배변활동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배출되어 건강에 큰 이상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금 조각은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서울시 하수도? 나와 십여 년 간 함께,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가고 헤엄도 치던 나의 금 조각...
모든 걸 알지 못하는 내가 나는 어렵다. 나를 둘러싼 모든 걸 내 손에 쥐고 싶다. 하지만 내 치아 위 금 조각이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뭘 알 수가 있지? 금 조각 하나가 내게 던진 화두. 권여선의 소설 <레몬>은 누가복음 23장 34절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말씀에서 시작된다. 소설가가 비틀어 붙인 제목은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이 제목의 연극으로도 상영되었다.)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마태복음 7장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내 금니의 행방도 모르는 내겐 나의 들보가 보이지 않는다. 금니가 없어진 걸 알고 보낸 한 주. 나는 입버릇처럼 중얼거린다. "제가 뭐 아나요. 제 금니 빠진 것도 모르고 사는데."
나는 모른다.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이번 주엔 모든 게 훨씬 나았다.
금 조각이 없는 채로 일주일을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니까 훨씬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 살았다. 토요일 오전 치과에 가 드디어 이를 채웠다. 충치가 심하지 않고 면적이 좁아 레진으로도 무난히 채울 수 있다고 한다. 잇몸을 통해 마취주사가 주입되는 순간 순식간에 아래턱과 혀가 얼얼해졌다. 이런 순간이면 나는 인간이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또 생각하게 된다. 약간의 약물이면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인간은 얼마나 무르고 약한지. 이 얼얼함을 잊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