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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천국에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노르웨이 행복학자가 삶의 끝에서 찾은 행복 수업)

by 안종익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지음) (2025. 3. 5. 초판발행)


어쩌면 잘 산다는 것,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밋밋하고 지루한 일일지도 모른다. 또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불평할 거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희망

어쩌면 탄탄한 구성과 부와 평화로 무장된 사회 속에서 사는 것은 의외로 행복에는 도움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빅 배드 울프 페러독스

욕심 많고 항상 배가 고픈 늑대는 평생 단 하나의 프로젝트에만 집착해왔다. 그 프로젝트란 바로, 같은 숲속에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분혹색의 살찐 아기 돼지 세 마리를 잡아 요리해서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기 돼지를 사냥할 계획을 세우고, 기다리면서 다른 모습으로 위장도 하고, 복잡한 함정을 만든 후 돼지들이 그 위를 지나가기를 끈기있게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교묘하게 돼지들은 늑대의 술수를 피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늑대는 세 마리 돼지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다.

돼지들을 묶어 놓고 커다란 냄비 안에 넣은 다음, 물이 뜨거워지자 늑대는 당근 등 채소들을 냄비 속에 넣었다. 군침을 삼키던 늑대에게 아들 늑대가 지나가면서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 내일은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늑대는 아들의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도대체 내일은 뭘 하면 좋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늑대는 얼른 돼지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슴을 치면 후회를 했다.

원래 자기 성찰을 못하는 늑대이지만, 그때만큼은 돼지를 잡아서 죽이고 요리해 먹는다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시야 내 또는 가능성의 지평선 내에 존재했던 돼지들이 사라진다면, 그가 아침에 일찍 눈을 떠야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파라다이스 내에서, 뱀은 “희망 부재”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극도로 빈곤할 때 희망을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극도로 부유할 때도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주린 배를 안고 잠자리에 들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우리는 이런 넉넉하고 편온한 상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도 잊어버릴 것이다. 행복한 삶은 어쩌면 풍요와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앞에 설명한 돼지와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다.


비교는 삶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와 비교하면 살고 있다. 비교 대사에 견주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런 비교 행위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위치,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좌표로 작용한다. 겨울이 없다면 여름도 없고, 빈곤이 없다면 부도 없는 것이다. 또 도덕적 비교행위는 비교 대상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 답은 비교 대상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또 자신을 누구와 비교하는가에 따라 삶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건 우리 자신이 결정하는 문제이다.


“삶의 오르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라. 훗날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 만나게 될 사람들도 바로 그들이니까.”


전 세계인과 나를 비교한다

미국에 불법 입국한 노동자들이 하루 열두 시간 이상을 일하고도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는다고 했을 때, 이들의 비교 대상은 이미 조국에 남아 있는 가난한 친구나 친지가 아니라,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하는 미국 내의 다른 노동자들로 변하기 마련이다.


행복은 성취가 아니라 비교에서 온다

유명한 스타가 평면 티브를 구입했다면,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린다. 하지만 이웃이 평면 티브를 구입하면, 나도 그것을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사회학자 마이클 마멋은 바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 비해 눈에 뛰게 오래 산다는 것이다. 생활면이 크게 다르지 않는데,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남들보가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더 나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오스카상을 받은 적이 있는 배우들은 이 상에 노미네이트만 되었던 배우들보다 평균적으로 4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는 의학자의 조사도 있었다.

소위 당근을 먹고 조깅하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면서 매일 여덟 시간의 수면을 규칙적으로 취한다고 해서 더 오래 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할렘의 주민들이 방글라데시 국민보다 평균 소득은 몇 배나 더 높지만, 평균 수명은 훨씬 짧은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비교 대상이 국제적인 개체가 아니라 뉴욕시의 주민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1996년, 미국 흑인들의 연평균 소득은 2만 6000달러였고, 평균 수명은 66세였다. 그런데 코스타리카에 사는 흑인들의 연평균 소득은 6400달러였고 평균 수명은 75세였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버느냐 또는 얼마나 성취할 수 있느냐를 나타내는 절대적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포함된 지엽적 사회 속에서 우리가 점찍은 비교 대상에 견주어 지신이 얼마나 더 많이 벌고, 얼마나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작은 연못 속에서 큰 물고기 행세를 하는 것은 그리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큰 물고기도 큰 호수나 바다로 나가게 된다면 관점이 달라진다.

평균 소득 5만 달러인 사회에서 4만 달러를 벌고 싶은지, 아니면 평균 소득 2만 달러인 사회에서 3만 달러를 벌고 싶은지를 조사하면 3만 달러를 선호한다고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평균 소득보다 더 많은 이들이 일반적으로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했다.


고통은 행복의 두 배로 온다

빈곤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는 초기 소득이 증가할 시기에 소득에 비례해 중가한다. 하지만 어느 한 점에 이르렀을 때, 이들의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것은 소득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은 부유한 복지 국가 내에서 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하위 3분의 1에 해당하는 빈곤층의 불행은, 상위 3분의 1에 해당하는 부유층의 행복보다 고통의 느낌은 만족감의 두 배로 느껴진다. 고 말한 학자가 있다.


질투심의 부정적인 느낌을 돌려 생각한다면 경쟁의식 또는 경쟁 본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무엇가를 더 해보고자 하는 열망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윈 이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단순한 필요를 바탕으로 존재한다. 바로 섹스와 권력이다.

남성은 섹스와 여자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권력을 쫓는다. 즉 남성들은 여자들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여성들은 남자의 권력과 권위에 매력을 느낀다.


모든 것은 비교적 상대적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하지만 ”비교적“그러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천성이 자리하고 있다. 건강한 사람은 많은 것을 원하지만, 병에 걸린 사람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부자가 원하는 것은 많지만, 가난한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원하는 것이 많지만, 포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카르페 디엠은 의미 없다

물론 그 순간, 그날 하루를 놓치지 않는 것 좋은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앞으로 5년, 10년 이후를 준비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묻혀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쏜살같이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제자리에 서 있는 존재로 변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한계를 하루 단위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된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즐긴다고 한다면 누가 담배를 끊을 것이며, 누가 지방질 많은 치즈와 살코기를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만 신경을 쓴다면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조깅을 하고 당근을 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기대감은 현실화 직전에 가장 달콤하게 느껴진다. 여행 중에 실망감이 드는 이유는 여행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대가 현실화되어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3피트 신드롬

보트 소유자가 보트를 바꿀 때마다 이전의 것보다 3피드 더 큰 보트를 구입해야 만족한다는 심리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삶이란 타인과 연계된 삶 속에서 자신의 꿈과 목표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존중을 받기 위해선 타인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렵고 도전적인 일을 달성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그 노력을 인정받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이들의 부러움 눈길을 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의 노력과 그 가치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니라 지루함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하루 또는 전체적으로 좋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 필요를 충족했을 때 받는 인정과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천국은 행복한 곳이라고 단순하게 잘라 말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삶이 지루해 못 견디는 사람도 있고, 따라서 우울증과 자살 충동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커지게 마련이다. 천국에서의 삶이 안정되고 풍요로울지는 몰라도 결국 그 삶은 지루하고 무덤덤하게 여겨질 것이 틀림없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참고 인내하며 사는 것은 미덕으로 여긴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하고 마침내 여유롭게 살 수 있을 때가 되면 이미 즐기기에는 늦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나라의 미덕에 젖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삶을 인내의 시험장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 생의 천국을 믿지 않는다면 왜 현세에서 이토록 힘들게 참아가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저 내려온 문화적 전통 때문에?

인생은 살기 나름이다.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금 한순간 느끼는 기쁨과 만족감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상 짜증과 불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지 않는가.


좋은 삶,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도취와 자기희생, 평등과 경쟁, 안정과 자유, 단기적인 것과 장기적인 것, 금욕과 즐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 산다는 말과 같다.


삶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서, 의미라는 것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 그 자체, 또는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작고 사소한 개별적 요소라고 말한다.


행복이란 다른 어떤 일을 하던 중에 얻을 수 있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는 긍정적 부작용 같은 것이다.


삶은 물컵을 보면서 반쯤 비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반쯤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 문제에 골몰하는 것보다는 해결 가능성에 더 집중하는 태도 등, 긍정적인 태도는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된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 현재의 물질 풍요 사회는 자취를 감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역사가 남긴 가장 기분 좋은 막다른 길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위와 전체 사회는 그동안 잊고 있던 마지막 대답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돼지 사냥이든,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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