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센터 미술 수업에서 들은 얘기
잘 모르면서 가십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십 대 중반을 훌쩍 넘어 그렇게 시작한 주민센터의 미술 교실. 과연 꾸준히 나갈 수 있을까 했지만, 그리는 시간이 기다려 질 정도다.
"한국은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고, 정치는 여전히 무속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고 있어.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 등 이러쿵저러쿵 불평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집 앞 주민센터가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양질의 수업을 참여하다 보면 다른 말이 나온다.
"그래, 복지가 이 정도면, 살만한 나라 아닌가?!"
스슥슥슥...
6평 남짓의 작은 교실 안에 들리는 소리는 4B연필이 스케치북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뿐이다. 이따금씩 선생님이 돌아다니시면서 한 명씩 코칭해주는 작은 목소리를 제외하면...
눈과 손이 스마트폰과 태블릿 기기의 빠르고 화려한 영상에서 해방된 시간이다.
총 세 시간 동안 그리는데 한 시간 반쯤 지나면 슬슬 집중도도 떨어지기 시작하고, 얼추 선생님이 샘플로 그리라고 한 밑그림이 완성되어 간다. 수강생들이 옆 사람과 소곤소곤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속삭임은 어느새 반 전체가 참여하는 대토론회로 변해 있다. 동네 아낙들이 우물터에 모여 빨래하면서 담소하듯이 주제는 버라이어티 하다. 며느리와의 첨예한 관계, 까칠한 큰 딸내미, 명절의 풍경 등등
하지만 연예인 얘기는 빠질 수 없는 단골이지 않은가.
누군가 넷플릭스를 얘기를 꺼냈다가 예능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셀럽들의 이야기는 주작된 내용이라 예능은 보지 않는다로 옮겨갔다.어쩌다 보니 몇 달 전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고 이선균 배우님으로 향했다. 연세 있으신 몇몇 분들은 그의 불륜과 도덕적 불찰에 대해서 말했다.
몇몇은 더 나쁜 놈들도 잘만 사는데 마음이 여린 배우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큰 어떤 이는 그의 와이프를 탓했다.
"와이프도 배우잖아"
"아, 그래요?"
"유명하진 않지만 배우인데, 성질이 좀 까칠스러운가 봐. 그러니 남편이 아내에게 말도 못 붙이고 어려워서 바람을 폈겠지"
"아내와 사이가 안 좋았나 봐"
"아내가 성격이 좀 있어 보이잖아"
"아내가 좀 따뜻하게 대했으면 바람도 안 폈을 텐데..."류의 흐름으로 이어져 갔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주민센터 교실에서 처음 만나기도 했거니와
연배들도 60대 이상인 분들이 많기에 나는 좀처럼 말을 붙이기 어렵다.
아니 나이와 상관없이 무리에게 좀처럼 내 의견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기에 말을 꺼내지 못 할 것 같다.
쓱쓱쓱
얘기를 들으면서 나의 연필은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종이 위의 선들은 거칠어진다.
마음속에 치솟는 말이 있다는 현상일 테다.
하지만 끝내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하는 말
'저도 멋진 배우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해서 애도를 했어요. 인생작으로 꼽는 작품 중 그의 연기에 감동을 받았고요.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도 좋아했어요. 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가 나오는 작품들은 왠지 신뢰가 가는 그런 배우였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의 개인을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부부의 일은 정말 자녀들을 포함해서 지인들도 잘 모르는 것이고요. 너무나 슬프고, 애도를 해야겠지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쉽게 그의 부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설령 그녀가 까칠해서 남편을 너그럽게 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어떻게 그의 죽음이 그녀의 잘못일 수가 있나요? 너무 쉽게들 말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녀에게 남겨진 혹독한 삶의 무게와 감정들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하실 수 있나요?'
화기애애하게 미소와 담소를 주고받으며 그림을 그렸던 미술 교실의 사람들에게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더 침묵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한 마디 거들어야 하는 건가.
아니 나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몸과 나의 입은 결코 그들에게 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수업 시간이 이십여 분간 남았지만 더 이상 대화가 듣고 싶지 않아 일찍 짐을 챙겨 나왔다.
평화로움으로 시작한 미술교실 수업의 끝은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마감을 했다.
야속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가을의 햇살은 알맞게 익었고, 낙엽은 파란 하늘 아래 천연색색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