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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Nov 06. 2024

가을 편지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인데 “네가 제일 먼저 결혼할 줄 알았다” 같은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된다. 계단을 오를 때였지. 어깨까지 늘어지는 가느다란 머리칼을 흔들며 “너는 또 그 소리”라고 질색하는 너의 대답. 아이들 먹을 빵을 고르라고 해서 푹신해 보이는 치즈가 들어간 빵을 골랐어. 우리가 먹을 빵으로는 여러 겹을 겹친 몽블랑이었는데 계절에 맞게 베이지색 밤 크림이 듬뿍 얹어 있었지. 몽블랑 빵을 나이프로 썰어 맛을 본 네 이마가 찡그려져. 촉촉하고 부드러운데,라고 생각한 나와 달리 네가 예상한 맛에서는 벗어났나 봐. 시식 코너에서 스콘을 한 점 집어먹은 후에도 이 집 스콘 맛집은 아니네,라고 평했지. 스콘의 미묘한 맛의 차이를 아는 것이 우리 나이인 건가라고 나는 별것도 아닌 것에서 나이를 생각했어.


너와 만나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학교 다닐 때 햄버거 집에서 아르바이트 한 이야기잖아. 시급이 1100원이었나 1200원이었나. 수업 끝나고 대 여섯 시간 일해서 나오는 급여를 확인하자마자 하는 일이 식당으로 달려가는 거였지. 급여 나오기 전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것들. 돌솥비빔밥, 떡볶이, 자장면, 탕수육. 급여의 반은 먹는 것으로 나갔던 거 같아.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학원비를 결제하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삼 년 만이야, 사 년 만이야. 만나지 못한 횟수를 세며 달콤한 빵과 시원한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았어. 사실 어젯밤에 열한 시 넘어 네가 내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아이들이 자는 시간이라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노란 조명이 달린 호프집에 들어가고. 테이블에 샐러드와 생맥주 컵을 한 잔씩 올려두고 있을 때 쨍그랑, 유리병 깨지는 소리와 중년 남성의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 너는 소란스러운 중년 무리를 마주 보는 시야였고 나는 너를 마주 보고 있어 소리의 증폭을 거친 숨소리를 두런거리는 주변인들의 음성을 등으로 느끼고 있었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네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겁에 질려 있었지. 온몸의 신경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움직여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었어. 저 사람이 유리조각을 우리 쪽으로 던지면 어쩌지. 이 작은 공간에서 사람을 찌르고 다니면,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야 하나. 소란은  잠잠해졌고 주인과 아는 사이였는지 인사말을 나누며 중년 남성 무리가 가게를 나갔지.


웃긴 게 말이지, 나는 내가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 노숙인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었지만 거친 사람들을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의미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소음, 욕설, 광기가 두려운 적이 없었어. 그런데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아이 두 명을 키우고 있는 전형적인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서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거친 음성이 무서워진 거야. 아, 나도 이런 게 무서운 사람이었네. 그러면 지금까지 내 두려움은 어디로 달아났던 걸까, 어디에 묻혀있던 걸까.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읽는데 마비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해. 마비, 마비 증세, 마비 상태, 내면으로만. 이 사람의 마비 상태라는 것을 자세히 알아봐야겠어,라고 생각했지. 마비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언급되는지 살펴봐야겠다고.


그러니까 지금 나는 마비에서 깨어나고 있어. 이제서야 말이지. 우리는 아마 서로의 탓이 아닌 이유들로 조금씩 얼어 있었을 거야. 밟히면 소리 내는 낙엽 더미처럼 우리 만남도 그 자리에서 시들어가며 비명을 지르고 있을까.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게 낙엽뿐 만은 아닐 거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잠재우지 않는다면, 밖에 아무리 소나기가 쏟아진다 한들 푸른 잔디가 자랄 리 없다.” 실비아 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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