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 믿음
작년, 내가 결혼하고 9~10개월 정도 흐른 뒤였다. 내 영혼과 마음의 쉼터이자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됐던 대전 늘찬양교회 목사님께서 집사 직분을 수여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교회의 일을 할 사람에게 직분이 부여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받은 직분은 어디를 가든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직분을 받지 않은 상태라면 교육을 수료해야 하고 수료자 중에서 추천받는 사람이 직분을 받고 교회의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만큼 교회의 직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지만 목사님께서는 서울에 터를 잡게 되어 대전으로 매주 출석하지 못하게 된 나에게 집사 직분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 뜻은 서울의 어느 교회에 가든지 우리 가정이 다니기로 정한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실하게 교회의 일을 맡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평소 교회를 다니면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집사님이라고 부르면서 인사했고 그만큼 흔하게 받는 직분인 줄 알고 있었던 나는 철저히 검증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사역을 맡아서 한다는 사실을 듣고 좀 놀랐다. 대학생으로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할 때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달게 듣고 교회 사람들과 목사님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한 주 동안 생활하면서 부딪친 문제나 다른 가족들의 안부, 기도 제목들을 나누고 서로 교제하는 게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직분을 받고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하니까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또 다른 면에서는 마음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내가 느낀 마음의 무게가 심한 부담감은 아닌 것 같다. 누가복음 7장에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던 백부장이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한 것처럼 ‘목사님! 제게 집사 직분을 주지 마옵소서 내가 집사로서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는 생각보다, ‘직분을 받고 일 할 때 내가 잘 못해서 욕을 먹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으니, 책임감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목사님과 사모님의 코로나 발병으로 인해 잡혀있던 일정이 연기됐다. 지금은 일정이 다시 잡히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교회는 아직 등록하지 않았다. 늘찬양교회 목사님께 직분을 받고 축복을 받은 후에 등록해도 늦지 않는다 판단을 했고, 아내도 동의했다. 현재는 아내가 청년 시절 다니던 교회의 예배를 계속해서 참석하고 있다. 이후 직분을 받으면 정식으로 등록할 생각이다. 물론 대전의 늘찬양교회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아내가 청년시절 다니던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교단이 다르지만,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교회에서 받은 집사 직분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인정이 되지 않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기독교한국침례회에 교리적 전쟁을 선포할 의향이 없는 이상, 나와 아내가 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 받은 직분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리 중 상응하는 부분에서 인정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직분이 인정되니, 안되니 하는 그런 부분은 아주 작은 사소한 문제일 것이고, 제일 큰 문제는 내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일 것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생각도 가장 먼저 해봐야 하는 생각은 아니겠다. 제일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이겠다. 태어날 때부터 주일이라 부르는 일요일에 교회를 학교 다니듯 당연하게 다녔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수도 없이 말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왔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교회에서 받은 가르침 중 하나다. 그래서 나는 먼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늘찬양교회를 찾아가기 전 군대에 있을 때, 교회 군종병으로부터 에스라하우스의 노우호 목사님의 설교가 녹취되어 파일로 저장된 CD를 받았다. 그 CD를 가지고 전역해서 집으로 왔었다. 그 녹취파일을 전역 후에도 계속 들었던 것이 복학해서 늘찬양교회를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말할 내용의 출처를 말하고자 한 거니까 그만 차치하고 넘어가자. 여튼, 그 녹취록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관해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아만’, ‘에무나’라는 단어로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아멘’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만’, ‘에무나’라는 단어가 믿음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성실하다, 충성되다, 신실하다, 진실하다, 영원불변하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중 어떤 단어로 번역해도 히브리 원문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에무나’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 개념이 한국사람들 한테는 각각 다른 개념으로 인식되는 거라고 하셨다. 설교 내용을 더 인용하자면 ‘에무나’가 믿음이라고 번역되는 바람에, 한국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믿음으로 인식하지만, ‘충성되다’라고 번역됐으면 한국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인식했을 것이고, ‘성실하다’라고 번역됐다면 또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설교 내용을 듣고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공만 다지는 것이 아니라 내공이 주춧돌이 되어 겉으로 표출되는 행동도 믿음의 일부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늘찬양교회에서 계속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괴감에 가까운 아쉬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길리 우고 연습한 자 318명에 관한 이야기나, 다니엘 1장 4절에서 바벨론 왕이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고 학문에 익숙한 사람을 왕궁에 데리고 와서 교육하라고 명령하는 장면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준비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읽게 된다. 아브라함이 318명에게 어떤 교육과 연습을 제공했는지 모르지만 4개국 연합군을 상대로 용맹하게 싸워서 이겼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궁에 선발될 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기준이 아니라 그때 당시 널리 퍼져있는 지식과 기술, 학문에 능통하다는 것이 합격점이었다. 이런 걸 읽으면 왜 나는 예전에 이걸 알지 못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이렇듯이 성경에 모범이 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께서 원하는 수준에 내가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릅쓰고 어디든지 갔던 사람들, 그리고 자기가 전한 말을 절대로 번복하지 않았던 모습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한 세상에서 강조하는 지식과 기술, 학문에도 능통했던 점들을 생각하면, 성경 속 인물 중에서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행동은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허탕 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을 따라 던지라고 하니까 그물을 던져보는 베드로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물론 믿음을 초석으로 두지 않고도 지식과 기술, 학문에 능통한 사람들이 있다. 아합과 이세벨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은 모압이라는 식민지를 가질 정도로 군사력과 경제가 강했다. (열왕기하 1장 1절의 행간을 곱씹어보면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는 인정되지 않았다. 또한 누가복음 12장 16절에서 21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부자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축적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면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들의 장면과 하나님께 혼나는 사람들의 장면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믿음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물론 희망사항으로는 ‘에무나’의 뜻처럼 성실하고, 충성되고, 신실하고, 진실된 믿음을 초석으로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지식과 기술, 학문들을 배우고 응용하면서 준비한 아브라함이나 다니엘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나에게는 많은 방면으로부터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세상을 거닐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평균수명이 늘어서 100살 가까이 살 수 있게 됐다는 세상이라고 하니, 아직 나는 완전히 늦어버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부터 늘찬양교회에서 배운 성경을 읽는 방법으로 창세기 1장부터 읽어 내려가면서 가능하다면 요한계시록 끝까지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무엇을 예비하고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가, 나의 소명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사명이 같은가, 등등…. 집사 직분을 받고 아내가 청년 시절 다니던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일을 맡아서 할 때까지 성경책 안에 기록된 주제들을 생각하고 행간을 곱씹으면서 나의 모습을 돌아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