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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귀향 - 소소담담

내가 사랑했던 것들, 본질로 돌아가는 길

by 카레맛곰돌이

17살, 부모님의 곁을 떠나 경북 영주로 향했다.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는 내가 알고 지내던 모든 풍경과 전혀 다른 낯선, 새로운 장소였고 나는 여기에서 조금은 이른 내 인생의 2막을 시작했다. 멋진 시작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17살의 나는 경상도 토박이들과 좀처럼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외지에서 온 나와 같은 친구들과도 5월이 되어서야 말문을 겨우 텄다. 그 사이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단순히 책을 좋아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처음 대화를 나눌 때 특히 놀랐다나.


그 후로 12년의 시간이 흘렀다. 영주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산으로, 삶이 방향을 지정해주는 대로 다양한 곳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사이에 내 의지는 없었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감정은 다른 사람과의 충돌로 깎여나갔다. 서산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처음 입대했던 당시의 순둥순둥했던 나는 어디가고 독한 놈만 남았냐', 동기생이 내게 물었고 그제서야 문득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9살 가진 것 없는 나였지만 손을 털고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29살의 나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귀향이었다. 하루아침에 29살 무직 백수가 된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 내가 살고 싶은 삶, 내가 놓치고 살아온 것들을 하나씩 주워담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놓치고 산 것들이 많았다.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엮여야 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어려운 가정 형편과 넉넉하지 못한 지갑 사정만을 생각하며 악착같이 돈을 아꼈고, 즐기는 방법, 노는 방법,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는 상태로 덜컹덜컹 삼각형을 억지로 굴리며 살아갔다.(늘 그렇듯 첫사랑이 제일 아련하고 안타깝다고 하는 것처럼,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후회로 남아있다.)


30살, 최근 면접 본 곳에서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안타깝지만 내가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던 자리는 아니다. 출판사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29살 청년은 다시금 항공기 정비사의 자리로 돌아갔다. 전역할 당시의 나는 무언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뭐든지 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준비 기간이 길어지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봐도 공허한 타격음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제서야 나는 명망있는 선장이 아닌 폭풍우 속의 항해자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결국 처음으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또한 귀향이다.


저자는 장성한 자녀들을 기르고 이제 환갑을 넘기는 아버지다. 그는 먼 길을 걸어왔고 60의 시작에서 뒤를 돌아보며 이 글을 적었다. 글 곳곳에서 그의 몸이 성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고, 그가 걸어온 길 또한 순탄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삶에는 몇 가지 변곡점이 있었다. 부모님의 죽음과 이로 인해 사회로 등떠밀린 가족, 형제의 죽음, 가족의 탄생, 돈, 그리고 건강, 흔들리는 삶을 지탱해 준 종교. 변곡점에서 그는 수많은 선택지 중 이 길을 걸으려고 했던 이유를 찾기 위해 글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파편화된 조각을 모아 뚜렷해진 답을 찾아냈고.


예전에 아버지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60년도 그 시절에는 다들 대가족을 형성했고 자신은 수많은 자식들 가운데 막내였다. 위에 있던 형들은 어느 날 갑자기 병으로 죽기도 하고 자동차 사고와 같은 사고로 죽기도 했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이었지만 그 또한 삶이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살았다. 환갑을 넘긴 지금도 가끔 나를 좋아해주셨던 형님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때 돌아가신 형님께 너희를 보여드렸다면 좋아하셨겠지, 하고.


저자의 글에는 자식을 사랑하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군에서 군인으로 장기복무하는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 품을 떠나 오래 나가 지내다 잠시 품으로 돌아왔던, 그리고 다시금 해외로 떠난 아들에 대한 미안함, 염려와 걱정의 단어들이 담겨 있다. 그가 말하는 귀향이란 이런 감정들이다. 성공이라는 직선 위에 올라타기 위해 어째서 이런 노력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 그 과정에서 저자는 귀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성공가도에 타기 위해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결국 가족에 뿌리를 뒀다는 걸 깨닫는 이야기가 여기에 담겨있다는 의미다.


30살, 과거의 시선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벌써 한 가족의 가장이 되고 아이들을 품어 기르는 나이였겠지만 지금의 나는 안타깝게도 그런 것 하나 없는 홀몸의 삶을 살고 있다. 아직도 게임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장난감을 좋아하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일 뿐이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삶의 편린을 보면서 잠시나마 생각할 수는 있다. 아마 우리네 아버지의 삶은 이렇지 않았을까. 내 아버지도, 저자도.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까. 솔직히 너무 먼 이야기라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내가 아버지가 될 수는 있을까. 하지만 우리의 삶이 으레 그렇듯 멀리서 던져진 공은 쏜살같이 날아와 내 글러브에 꽂힐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내가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까,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는 내 아버지처럼 우리네 아버지의 삶을 살아온 저자의 이야기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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