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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줌스 May 11. 2022

22년째 게임디자인 하고 있습니다

고인물 게임디자이너

2001년, 스물 한 살 여름에 게임디자이너가 되었다. 서른 명이 조금 넘는 팀에 게임디자이너는 나 혼자 뿐인 시절이었다. 당시 디자이너란 일반적으로 아티스트를 뜻하는 용어였고, 게임디자이너는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게임디자인을 가르쳐주는 사수도 없었던 시절. 어쨋든 게임은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프로그래머 형들, 아티스트 형들 따라다니며 게임디자인을 배웠다. 그리고 22년째 현업 게임디자이너로 살고 있다.


나의 개발인생은 뜻대로 풀리진 않았다. 업계에 들어서 막 일, 이년차를 지나던 시절 삼십대 중반 즈음이 되면 나는 유명 게임디자이너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내 이름을 내건 게임을 출시 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두 번의 창업을 경험하고, PC MMORPG 두 번, 모바일 RPG 두 번, 스포츠게임도 한 번 출시하는 2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서른일곱 여름, 두 번째 창업이 망했다. 정말 암담했다. 성공한 프로젝트가 하나도 없는, CEO 경력을 가진, 십칠년차, 서른일곱 살의 게임디자이너를 누가 실무자로 고용하려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면접마다 PD, CEO 경력이 있는데 실무가 가능하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실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각오가 없었다면 지원도 안 했겠지만, 면접관에게 내가 왜 실무 게임디자이너로서 좋은 인재인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면접관의 표정은 그닥 밝지 않았다. 그럼 애초에 면접에 부르지 말던가...


제천, 의림지 @줌스


인생은 항상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간다. 면접마다 낙담을 하던 중 퍼블리셔로 관계를 맺었던 적이 있는 N사의 상무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게임디자이너가 아니라 사업PM으로 전직을 요청 받았다. 그 때 나는 더운물 찬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상무님의 제안을 확정하고 입사 절차를 진행하던 중 그 전에 이력서를 넣어 두었던 외국계 게임사로부터 면접 제의를 받았다. 실무 게임디자이너 포지션이었고, 내 경력에 대해 어떤 선입견도 없이 나를 평가해 주었다. 생각지도 않게 외국계 게임사에도 합격하면서 국내 대기업 N사와 외국계 게임사 오퍼를 양 손에 쥐게 되었다. 인생은 항상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반전을 맞이하고,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나는 게임디자이너를 계속 하기로 했다. 더 좋은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과 아마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렇게 게임디자이너로서 2막을 시작했다. 그 뒤로 한번 더 이직을 해서 지금은 또 다른 N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 남았으니 누구나 할 수 있어


내가 처음 게임회사에 취직했을 때, 사십대의 내가 여전히 게임업계에서 게임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게임디자이너로 살아 남아 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프로젝트가 하나도 없는 게임디자이너가 22년 동안 생존했다. 나도 해냈듯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음 나의 목표는 18년을 더 게임디자이너로 버텨보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지금까지 살아 남았으니 누구나 할 수 있어"라고 내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을 응원하며 멋지게 은퇴하는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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