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어 공부-어휘 늘리기
단어 암기와어휘 습득에대해서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 서점에는 수많은 영단어 암기 책이 있다. 공무원 시험 합격을 위한 책도 있고, 토익을 위한 암기 책도 있다. 개중에는 그저 암기를 수월하기 위한 한국어 언어유희를 도입해서 그 수많은 영단어를 암기하게 도와주는 책들도 있다. 예를 들어 Reap이라는 단어가 수확하다라는 뜻인데 이를 소문자 r이 낫과 비슷한 모양이다라고 설명하는 수준의 암기방법으로 특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끈다. 이런 수준의 언어 학습법은 목적이 시험에 있을 뿐이지 절대 어떠한 인문학적 소양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나은 것은 어원에 대한 학습법이고, 이는 한국 수능 외국어영역의 전설적인 강사 김기훈 선생도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원어민과의 인터뷰에서 수준 높은 어휘를 구사하며 원어민의 발음은 아니지만 상당히 유창하고 조리 있는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는 강좌에서 종종 어원 몇 개만 알면 영단어를 통달할 수 있다는 이야길 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탈리아어를 학습하면서 가장 고무적인 것은 영어로 쓰여있는 글들이 더 쉽게 읽힌다는 점이다. 예전엔 별 관심 없이 바라봤던 영어의 텍스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까지 받는다. 영어를 이루는 대부분의 어휘가 라틴어에서 왔고, 이탈리아어는 라틴어가 탄생한 그 장소에서 라틴어를 계승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기 때문이 아닌가는 생각을 해본다. 따라서 이탈리아어의 대부분의 어휘가 사실은 라틴어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어휘들은 가끔은 영어의 어원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아주 기본적인 동사들인 "있다(be, essere), 가지다(have, avere), 취하다(take, prendere), 놓다(put, mettere), 붙잡다(hold, tenere), 보다(see, vedere), 먹다(eat, mangiare)" 등은 형태가 다른데, 이 기본적인 이탈리아어의 동사들이 영어의 고급 어휘를 구성하는 어원이 되곤 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Legend라는 단어가 있다. 어떤 영어 선생도 Legend가 왜 legend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것이 라틴어 어원에 뜻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이탈리아어에서 읽다는 어휘는 Leggere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에서 유래를 두고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라틴어 동사 Legere는 사실 "줍다, 수집하다"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책을 읽는 행위를 활자를 눈으로 수집하고 모으는 행위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영어의 Collection은 사실 함께를 뜻하는 Con과 수집을 의미하는 legere가 결합하여 하나의 종합적인 수집품인 컬렉션이라는 뜻이 된다. 더 나아가서 라틴어의 제룬디오(동명사 형식)로 Legere를 표현하면 legend가 된다. 뜻은 "읽을 만한 것"이 되면서 읽을 만한 것이기에 "전설"이 되는 것이다.
어원 몇 개를 공부한다고 모든 영어의 비밀을 파헤칠 수 없는 것이 사실 우리가 공부해야 할 한자의 수가 적어도 2000개는 된다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원을 공부하면 할수록 좋지만, 사실 그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요소일 뿐 어휘 학습의 전부가 될 수 없다. 물론 어원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좋다. 다만, 한국의 수많은 어원 교재라는 것이 영어를 구성하는 어휘의 단면만을 보여주고 있고 실제로 그 안에 내재된 수만 가지의 어원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어에서는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 Lamentarsi(불평불만을 표하다)는 영어에서는 매우 고급 어휘인 Lament(애도를 표하다)가 되는데, Lament를 어휘 습득 방식으로 공부하기엔 한국에 있는 교재들엔 어떠한 단서도 없다.
크라셴 교수는 Comprehensible Input을 이야기하면서 어휘 학습에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독서"를 주장했다. 언어 습득에 있어서 독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맥락 속에서 살아 숨 쉬지 않는 어휘는 그저 "시험용 단어"가 되어 버린다. 토익에서 골라야 하는 어휘 문제의 보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된다. 책의 텍스트에서 어휘는 의미 있는 형태로 다른 텍스트들과 살아 숨 쉰다. 그렇기에 그 어떠한 학습보다도 독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 서적 독서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고 또한 많은 시간이 투입되기 때문에 독서는 지루해지기 마련이고 점차 다른 학습법에 대한 욕구가 고개를 들이민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겪는 과정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어휘 학습방법은 이렇지 않을까. 일단은 문법책이 한 권 필요하다. 어설프게 쓰인 책 말고 단어를 놓고도 해석이 안될 때 설명해줄 수 있는 문법책 말이다. 예를 들어 Glielo라는 이탈리아어가 나왔다고 하자. 이것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이것의 뜻은 그/그녀에게 그것을 이라는 문법적 구성의 어휘이다. Gli가 to him or her라는 뜻이고, lo는 그것을 이란 목적격 대명사이다. 그걸 연결해주는 접사가 e일 뿐이다. 이런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 단어를 만날 때마다 이해를 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Mangiavo guardando la TV(TV를 보면서 먹고 있었다)라는 표현이 나왔다 치면 문법적 배경이 없으면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다. 특히 이탈리아어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직관적인 언어이기에 동사의 형태에 주어와 시제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문법공부는 피할 수 없다.
문법을 외우지 않고 그저 설명과 예문을 통해서 살펴보다 보면 다음에 비슷한 어휘가 책에 나와도 어렴풋 그 뜻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또 비슷한 어휘가 나오면 그때는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엔 어느 정도의 문법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사물을 정리해놓은 단어집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어면 영영 그림 사전, 이탈리아어면 이탈리아어 그림 사전 같은 어린이를 위한 사전 말이다. 손톱(Unghia)이 뭔지는 머리(Testa)가 뭔지 정도는 문맥으로 유추할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있는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 이후에는 적절한 책을 골라야 한다. 폼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수준을 반영할 책을 골라야 한다. 처음 접하는 언어는 아기가 언어를 배우듯이 배울 수밖에 없다. 아기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처음 접하는 언어는 아기처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Comprehensible Input의 취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처음 사야 할 책은 0-2세 책이 되어야 한다. 0-2세 책은 그림을 통해서 어휘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런 책들을 몇 권 접하고 나서는 점차 나이를 늘려가야 한다. 결국에는 중고등학생 수준까지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계속 독서를 해야 한다. 독서를 통해서 나의 이탈리아어는 0세에서 2세로, 2세에서 5세로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물론 배경지식이 있는 책은 성인 책도 수월하게 읽을 수 있긴 하지만, 언어 학습에서는 이러한 성장 지향적이고 단계적인 Input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오디오북도 있다면 정말 좋은 교재가 된다. 웬만하면 오디오북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음성을 같이 들을 수 있다면 이는 최고의 언어 습득 방법이 된다. 절대 발음할 줄 모르면서 소리 내서 발음하지 말자. 그 어휘에 대해서 잘못된 발음 습관을 만들 수 있다. 차라리 듣는 것이 좋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쓰겠다.
언어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 어휘도 함께 성장한다. 시험을 앞둔 상황이라면 이러한 방법은 어찌 보면 지겹고, 오래 걸리고 의미 없는 방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기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언어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통로로 사용하고 싶다면 절대 시험 준비하듯 언어를 공부해서는 안된다. 오직 독서만이 언어를 습득하는 유일한 길이고, 언어 습득은 성장하는 과정과 마찬가지이기에 언어를 습득하기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시험용 공부를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 지금 당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