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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선생 Feb 05. 2023

부부 교사의 상호 불가침 기간

사랑과 전쟁 현실판

- 여보세요? 큰율이니?
- 네 아빠 어디에요?
- 응 아빠 나성동이야. 아직 안 잤네?
- 네
- 으애앵꺄악
- 뭐야 세율이도 안 잤어?
- 네 아빠 두율이도 안 자요.

이사 준비로 바쁜 남편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갔어요. 저는 하원 후 아이들과 옆 단지 실내 놀이터에서 놀고 저녁 먹고 만들기 놀이를 했습니다. 어느새 아이들이 많이 자라서 형제끼리 꼼지락 옴지락 잘 놉니다. 막내도 오빠들 옆에서 장난감을 맛보며 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 7시에요. 2년 전만 해도 저녁에 혼자 아이 둘을 보면 힘들고 지쳐서 어찌나 시간이 안 가던지요. 이젠 둘째 아들이 대변 보고 목욕하면 혼자서도 거품 놀이를 즐기고, 엄마가 없어도 첫째와 셋째가 서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며 쑥쑥 자라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옆에 남편이 있었다면 어깨를 감싸며 애들 키우느라 고생했다고 도닥여 줬을 텐데요.


막내가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밤 분유를 타고 잘 준비를 합니다. 이전엔 저녁 독박 육아에 분노했던 적이 많았지요. 막내가 클수록 잠드는 시간이 오래 걸려 공들여 토닥토닥 재우면 큰 아이가 방문을 벌컥 열거나 무섭고 심심하다고 잠든 동생을 깨워놓기 일쑤였거든요. 그때만큼 화나는 순간이 있을까요. 아이 입장에서 보면 혼자 있으면 무서우니 엄마를 찾는 게 당연한데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던 순간이 생각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분노의 날들을 보내고 이젠 아이들을 동시에 재워보기로 했습니다. 평소 두 아들은 안방에서 저와 자고 막내딸은 작은방에서 남편과 함께 자는데 이번엔 작은방에 나란히 네 명이 누웠습니다. 막내딸은 졸린데도 오빠들과 놀고 싶은가 봅니다. 애써 눕힌 오빠의 머리를 밟고 손가락으로 귀를 파고 웃는 통에 겨우 조성한 수면 분위기가 깨졌습니다. 조금씩 화가 올라와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할 일이 많은데 아이들은 수련회에 온 것 마냥 자기들끼리 킥킥거립니다. 이때 가장 빠른 방법은 엄마가 먼저 잠드는 것이에요. 아이들은 혼자 깨어 있는 걸 무서워하거든요. 코 고는 척을 하니 아이들은 이제야 진정하고 다시 눕습니다. 막내는 손을 빨며 잠을 청해요. 아들은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요. 좋아하는 간식 이야기, 만화 이야기, 규칙 이야기, 아빠가 어디 갔고 언제 오는 둥 제법 세상 물정에 아는 체를 합니다. 아이들의 대화를 자장가 삼아 진짜 저부터 잠들어버렸어요. 새벽에 깨니 아이들은 서로 엉켜 잘 자고 있었습니다. 똥강아지들은 잘 때도 똥강아지처럼 올망졸망합니다. 막내의 발에 양말을 신기고 방 온도를 점검하고 남편을 찾았습니다. 새벽 1시인데 안 들어왔네요. 혹시나 밖에서 쓰러져 잠든 건 아닌지 전화를 여러 번 걸었습니다. 겨우 통화 연결된 남편은 잘 놀고 있대요.


부부 교사에겐 '상호 불가침 기간'이 있습니다. 3월, 7월, 9월, 12월 학기 초와 학기 말입니다. 학기 초엔 새로운 사람과 업무에 적응하느라 예민하고, 학기 말엔 평가와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습니다. 이 시기엔 서로의 작은 실수에 눈을 부라리고 '당신 대체 나한테 왜 그래'라고 날카로운 말이 앞섭니다. 상호 불가침 기간에 저녁 약속 또는 회식이 잦으면 상호 불가침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어 내전이 발생해요. 내전이 일어나면 아이들만 피해 보지요. 다행히 방학엔 암묵적으로 휴전 협정을 맺어 개인 일정에 관대해집니다.


학기 중이었으면 혼자서 아이 셋을 데리고 잔 것을 작은 전투에 참가한 것에 비유하여 남편에게 공을 인정받고 싶어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엔 오랜만의 약속이라 '그럴 수 있지. 재밌게 놀아요.'라며 쿨한 부인 연기를 해보았습니다.
결혼 생활하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가족의 건강입니다. 그중 으뜸은 부끄럽지만 제 건강이지요. 제가 편안한 게 가장 우선이고 그다음 남편의 편안함과 건강이 중요해요. 부부가 안정되어야 아이들도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돌아오는 주말부터 남편의 외박 일정이 잦아집니다. 그때까지 쿨한 부인 역할을 고수해야 할 텐데요. 아마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동기 모임, 동아리 모임, 전체 동문 모임을 이어나가는 남편과 또 그것을 강요하는 체육과의 풍습을 씹으며 밤 독박 육아 전투에 참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을 대비하여 그리고 밸런타인데이를 겸하여 초콜릿을 일발 장전해야겠습니다. 육아를 전쟁에 비유하여 안타깝지만, 사랑과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니까요.


근무경력과 육아 경력이 쌓이는 만큼 마음 근육을 단련해서 상호 불가침 조약을 끊고 평화협정을 맺을 날을 기대해 봅니다.
올해엔 남편이 휴직하고 저는 반일만 근무하는 시간선택제를 신청했습니다. 첫 학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전쟁은 가고 사랑만 남았다는 소식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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