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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텐 May 03. 2023

목소리와 첼로가 만났을 때

18세기 아리아와 첼로 오블리가토


클래식 고음악 음반 소개


음반명 : 체칠리아 & 쏠, 달콤한 듀엣 (Cecilia & Sol, Dolce Duello)

연주자 : 체칠리아 바르톨리(메조 소프라노), 쏠 감베타(첼로), 안드레스 감베타(지휘), 카펠라 감베타(반주)

레이블 : 데카 (Decca)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까운 악기는 무엇일까? 이견이 있겠지만 대부분 첼로라고 알고 있다. 중저음의 자연스러운 음색은 목소리와 매우 닮았다. 그럼 첼로와 성악이 같이 노래한다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 이 음반은 이탈리아의 걸출한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첼리스트 쏠 감베타의 듀엣 음반으로 두 스타 연주자의 조화와 대결, 목소리와 악기의 대립과 화합을 보여주는 '협주적' 구성으로 짜였다.


18세기 오페라와 칸타타 중 첼로 오블리가토(obbligato)가 있는 아리아를 발췌해 연주했는데 주로 이탈리아 작품을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오블리가토는 '너무 중요해서 뺄 수 없는 악기'라는 의미로 주로 독창과 함께 주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를 뜻한다. 이 음반에서는 '독주악기와 목소리가 서로 겨루고 화합하는 음악형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블리가토 역할을 맡은 악기는 노래의 반주가 아닌 주선율을 연주하며 목소리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조화와 대립이라는 협주 형식은 서양 고전음악의 여러 양식 중 하나로 협주의 이상이 가장 정교하게 완성된 것이 독주자의 기량을 뽐내는 독주악기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등)이다. 연주자의 비중이 큰 이런 대형 협주곡은 18세기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 바로크 시대의 오블리가토는 대결과 조화라는 협주곡의 이상을 먼저 재현한 양식으로 볼 수 있겠다. 오블리가토 형식의 아리아에서 가수는 악기처럼 정확하고 빠르고 높은 목소리를 내야 했고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처럼 자연스럽고 온기 있는 음악을 들려줘야 했다. 과연 이 음반에서 메조 소프라노 바르톨리의 풍윤한 목소리와 감베타의 낭랑한 첼로의 공명은 절정의 기량은 물론 따스한 온도가 깃든 음악 모두를 들려준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태양의 신 아폴론과 반인반수 마르시아스가 음악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가 있다. 신과의 대결을 그린 신화의 결말이 늘 그렇듯이 도전자의 오만함을 벌하는 결말로 끝나지만 이 신화를 통해 우리는 목소리와 악기의 대립이라는 주제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인반수의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는 주색을 밝히며 디오니소스 행렬을 따라다니는 광기의 무리 중 하나였다. 어느 날 마르시아스는 아테나 여신이 불다가 버린 아울로스라는 이름의 피리를 주워다가 연습해 피리의 명인이 되었다. 그 신묘한 피리 소리에 자연만물 모두가 감동했다고 한다. 아테나의 피리는 메두사가 죽을 당시 자매들이 울부짖는 통곡의 소리를 모방해 만들어진 악기였다. 그래서 아울로스의 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마성의.힘이 있었다. 그런 피리를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야수 마르시아스가 연주했으니 그 강력한 감화력이 만물을 뒤흔들어 놓고도 남았으리라. 뛰어난 연주에 자신감에 고취된 마르시아스는 리라의 명수 아폴론에게 음악 대결을 신청한다. 팽팽한 대결 끝에 아폴론이 리라 반주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어 노래를 부르자 대결은 아폴로의 승리로 돌아갔다. 피리를 연주하면서 목소리를 낼 수는 없기 때문. 마르시아스는 패배의 벌로 산 채로 껍질 벗겨지는 형벌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목소리가 내는 노래의 힘을 말하는 걸까? 메두사-디오니소스-사티로스로 연결되는 음악의 마력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질서의 음악(낭만주의)을 이기는 질서의 음악(고전주의)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통칭해 '음악의 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메조 소프라노 바르톨리의 노래, 육성과 가장 가깝다는 첼로의 저음은 신화에서 언급된 음악의 힘에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음반은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신화적 프레임을 바르톨리와 감베타의 연주 속에 흥미롭게 옮겨 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첼로의 음역을 알토라고 한다면, 음반 제목대로, 메조 소프라노와 알토가 벌이는 '달콤한 듀엣(dolce duello)'인 것이다.


니콜라 푸생, <아폴론과 마르시아스가 있는 풍경>, 1627. 마르시아스(가운데)와 아폴론(오른쪽)


음반에 실린 17-18세기 작곡가들의 면면은 화려한 이름들이다. 서양음악사에서 첼로 독주곡의 기반을 닦은 도메니코 가브리엘리(Domenico Gabrielli, 1659–1690),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의 상징적 존재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Antonio Porpora, 1686–1768), 100여 편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남긴 안토니오 칼다라(Antonio Caldara, 1670–1736), 특유의 세련된 멜로디로 유명한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1), 오페라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게오르그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 첼로 협주곡의 걸작을 남긴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의 음악이 담겼다. 헨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탈리아 음악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음반의 백미는 헨델의 아리아라고 생각한다.


가브리엘리의 오라토리오 <볼로냐의 왕, 성 시지스몬도 San Sigismondo, re di Borgogna(1687)> 중 '바람아, 나의 한숨을 날려다오 Aure voi, de' miei sospiri'는 바람과 한 숨의 효과를 묘사하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떨림, 바르톨리의 섬세한 약음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메아리친다. 비발디의 아리아 '올리브 그린 Di verde ulivo'(1719)은 오케스트라가 반주하지만 주선율을 노래하는 목소리를 떠받치는 역할은 첼로가 맡고 있다. 첼로는 아리아를 리드하고 노래가 쉴 때에는 빈 공간을 채우며 시종일관 분주하게 움직이며 넉넉하게 목소리를 채운다. 뛰어난 성악 교수이자 오페라 작곡가였던 포르포라는 자신의 오페라에 첼로 오블리가토를 적극 사용했다. '나를 비추는 올바른 사랑 Giusto Amor, tu che m’accendi'은 첼로와 목소리가 마치 샴쌍둥이처럼 움직이는데 첼로가 목소리의 감정을 좀 더 격정적으로 대변하기도 하며 아리아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메조 소프라노와 알토의 이중창을 듣는 듯하다. 도입부에서부터 첼로를 성악처럼 다루는 포르포라의 솜씨가 여기에 숨어있다.


칼다라의 아리아는 두 곡이 실렸다. 이탈리아 성악이 급속히 발전하던 17-18세기를 살았던 칼다라의 예술은 성악곡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칼다라의 <행운과 희망 Fortuna e speranza>은 첼로와 성악 파트를 동등하게 교차시키며 주인공의 갈등을 번갈아가며 드러내는데 첫 소절을 시작하는 첼로의 감상적 선율이 성악의 멜랑콜리한 음색과 합류하면서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바르톨리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고 노래 소절 사이사이에 삽입된 첼로는 비극의 코러스와 같은 역할을 한다. 첼로는 주인공의 독백을 받쳐주거나 주인공의 심정을 반영하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노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설파했듯이 비극은 집단으로 춤 추고 노래하는 코러스의 음악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비극의 고통과 슬픔은 음악의 디오니소스적인 힘에 기대고 있으며 인간에 깃든 야수성 사티로스의 힘에서 유래한다. 코러스는 디오니소스와 사티로스의 힘을 전달하는 무녀이자 이성의 질서를 허물고 만물을 태초의 상태로 무위화하는 힘이다. 칼다라의 아리아에서 첼로는 마치 코러스의 예술처럼 우리를 숙연하게 깊은 성찰로 안내한다. 그것은 또한 마르시아스의 피리 소리이기도 하다.  


라파엘로 <성 세실리아의 환희>, c. 1514-1517


오블리가토는 비단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헨델이 활동했던 18세기 런던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헨델의 아리아는 두 곡이 실려있는데 그중 칸타타 <성 세실리아 날을 위한 송가 Ode for St. Cecilia's Day>(1739)아리아 '음악이 일으키고 진정시키지 못할 정념이 무엇이리? What passion cannot Music raise and quell!'는 첼로 오블리가토 아리아의 백미이며 이 음반에서 가장 감동적인 곡이다. 가사는 영국의 비평가이자 시인 존 드라이든(John Dryden, 1631~1700)의 시 <성 세실리아 날을 위한 노래 A Song for St. Cecilia's Day>(1687)에서 가져왔는데 성경의 창세기에 음악의 창시자로 기록된 유발(Jubal)을 등장시켜 음악이 우주 조화를 담고 있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하르모니아 문디 Harmonia Mundi' 사상을 담고 있다.


음악이 일으키고 진정시키지 못할 정념이 무엇이리?
유발이 조개껍질로 화음을 맞추었을 때,
듣고 있던 형제들은 멈춰 서서
얼굴을 떨군 채 경이로워하며,
그 천상의 소리를 찬양했노라.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이 아니고는,
그토록 감미롭고 훌륭하게 말하는 이가
조개껍질 안에서 일으키고 진정시키지 못할 정념이 무엇이리?


위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면 천상에서 천사들이 노래 부르고 있고 가운데 위치한 성녀 세실리아는 지긋이 하늘을 쳐다보며 연주를 듣고 있다. 성녀의 발 밑에는 여러 악기들이 흩어져 있어 그녀가 음악의 성인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런데 정말로(!) 마음을 위무하는 듯한 첼로의 따스한 저음과 사색하듯이 천천히 내려앉는 메조-소프라노 음성이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건드린다. 바르톨리의 감동적 가창은 말 그대로 음악의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음반의 마지막 곡은 성악이 아니라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의 걸작 <첼로 협주곡 D장도 G.483>이다. 이 곡은 독주악기의 비중을 확대해 근대 협주곡의 초기 양식을 정립한 곡이다. 18세기 중엽부터 런던을 필두로 유럽의 대도시에는 대형 콘서트홀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메 발맞춰 대규모 기악 협주곡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작곡가들은 협주곡의 흥행을 통해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음악 비지니스와 결합해 걸작이 쏟아져 나오며 '대결과 화합'이라는 협주곡의 이상을 보여주었다. 이 음반의 대부분이 아리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마지막 보케리니의 곡에서 첼로는 자신의 존재를 웅변하듯 증명하며 대미를 장식한다. 오블리가토를 넘어서 콘서트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이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대결이 음악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드러냈듯이, 바르톨리와 감베타의 듀엣은 음악적 조화의 희로애락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오블리가토만큼 그 신묘한 조화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양식이 또 있으랴.


https://www.youtube.com/watch?v=K3U1KVXku_o

메조 소프라노 바르톨리와 첼리스트 감베타의 인터뷰와 연주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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