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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텐 Apr 20. 2024

돈 조반니와 싸드적 인간

모차르트와 18세기 자유주의적 성 도덕



음반명: 모차르트 <돈 조반니>

연주자:  브린 터펠(돈 조반니) 제임스 레바인(지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




                                                                                 성적 욕망이 인간을 주체로 만든다. - 자크 라캉



이번 글의 주제는 모차르트(1756~1791)의 오페라 <돈 조반니>(1787)와 가학성애를 가리키는 용어 '싸디즘'의 기원인 프랑스의 작가 싸드 후작(1740-1814)이다. 불어로 동 주앙, 스페인어로 돈 후안, 이탈리아어로 돈 조반니라 불리는 이 반사회적 난봉꾼은 카사노바(1725~1798)와 함께 유럽의 대표적인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는데, 카사노바가 실존 인물인 것에 비해 돈 조반니는 유럽에 떠돌던 민간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다. 돈 조반니가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630년 스페인 극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1579~1648)가 쓴 비극 <세비야의 호색한과 석상손님>(1630)에서이다. 프랑스에서는 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가 1665년 <동 주앙과 석상의 잔치>에서 이 엽색가를 무신론자이자 자유주의자로 등장시켜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몰리에르는 돈 주앙을 통해 관습에 도전하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긍정하며 18세기 자유주의 사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바람둥이 돈 조반니는 17세기 중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신분제를 비롯한 구체제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 계몽주의, 개인주의 사상의 태동을 담고 있는 캐릭터였다. 상류층의 문란함에 대한 조롱이 담긴 풍자극은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1732-1799)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1784)의 주제이기도 했는데 이 문학작품 역시 모차르트가 1786년에 오페라로 작곡했다. 1786년, 1787년 연달아서 두 편의 문제적 오페라를 모차르트가 작곡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시 예술가들이 신분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전 유럽적으로 공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몽주의 사상과 함께 대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시기의 '망탈리테 mentalité' 즉, 시대적 심성은 예술가 개인과 유럽 사회가 공유하는 집단적 구조였던 것이다.


성애를 추구하는 무신앙의 자유주의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 1787년 (비엔나가 아닌) 프라하에서 초연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몰리에르와 보마르셰의 비판 의식을 공유한다. 이 오페라에서 돈 조반니는 돈나 안나, 체를리나, 돈나 엘비라 등 여자들을 유혹하고 엽색 행각을 벌이는데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 <카탈로그의 노래>에 따르면 스페인, 프랑스, 터키, 이탈리아에서 모두 2천여 명의 여자를 유혹했다. 오페라 중 가장 극적인 부분은 묘지에서 살아난 유령 석상과의 만찬에서 회개하라는 석상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은채 기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돈 조반니를 묘사한 마지막 장면이다. 유령 석상과 돈 조반니의 어둡고 음울한 노래가 교차하며 돈 조반니의 비명으로 막을 내리는 최후의 장면은 매우 긴박하고 스릴 넘친다. 이 장면에서 돈 조반니는 악당이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 자신의 반윤리적 행동에 대해 떳떳한 자, 회개라는 신의 뜻을 거역한 자로 18세기 프랑스에서 팽배했던 무신앙적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영웅처럼 묘사된다. 돈 조반니라는 캐릭터는 당대 자유주의 사상의 산물로 신을 믿지 않고 도덕을 조롱하는 사상가, 혹은 성적으로 타락한 자로서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리베르탱(libertain)'이라 불렀고 이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방종한 행동을 '리베르티나쥬(libertinage)'라고 칭했다.


에로틱한 묘사가 돋보이는 프랑수아 부셰, <레다와 백조>, 1741


리베르탱은 혁명 전 구시대의 신분사회에서 도덕과 규율에 구속되지 않고 거침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그 당시 문학의 한 장르였던 '리베르탱 소설'은 분방한 행동을 통해 이성을 중시하던 계몽주의 사상 이면에 있는 감각적 욕망에 대해 주목했다. 리베르탱 역시 신보다 인간을 앞에 둔 계몽주의자였지만 이성과 감성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 따라 서로 다른 철학을 설파했다. 유명한 '리베르탱 소설'로는 프랑스의 작가 쇼데를로 라 클루아(1741~1803)의 <위험한 관계 Les Liaisons dangereuses>(1782)가 있다. 소설은 순진한 양갓집 규수를 유혹하거나, 정숙한 부인을 농락하는 등 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의 도덕적 문란함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미술사에서 로코코에 속하는 이 시대의 많은 그림이 그러했듯이, 심지어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프랑수아 부셰의 로코코 회화를 '젖과 엉덩이의 회화'라고 직설적으로 쓸 정도로 성애를 대하는 프랑스 상류층의 에로티즘은 시대를 관통하는 풍류였다. 이 브런치의 글 <혁명 전의 파리 살롱의 여흥>에서는 음악가 자크 뒤플리의 감미로운 클라브생 소나타로 그 시대의 음악을 들여다보았지만, 클라브생 음악은 사치가 극에 달한 귀족층의 세련되고 화려한 취향은 드러내지만 방탕한 취향은 드러낼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세련됨과 방탕함은 한 몸과도 같은 것이지만 방탕함은 '리베르탱 문학'의 형식을 취한 오페라에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와 같은 무대극에서 바리톤의 터프한 음색과 오케스트라 어두운 음악에서 남녀 간의 위험한 게임으로 드러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gGD-59mLWWE

돈 조반니가 체를리나를 유혹하며 부르는 아리아 <우리 함께 손을 잡고>



무신앙의 자유주의자로 회개하지 않고 기꺼이 지옥에 떨어지는 돈 조반니의 최후에서 우리는 극단적 리베르탱이었던 싸드 후작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싸드 후작 스스로가 돈 조반니와 같은 호색한이었고 매춘부의 몸에 칼로 상처를 내거나 최음제를 먹이고 기절시키는 등 사회적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수의.음란물 출판으로 감옥과 정신병원을 전전한 인물이었다. 그의 소설에서는 도덕, 종교를 조롱하고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한 육체적 쾌락을 찬양하는 내용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1782)는 싸드 사상을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드러낸 글인데 임종을 앞두고 사제 앞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선과 악을 그대로 인정하며 신이 아닌 여자들의 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무신론자의 의연함이 싸드의 리베르티나쥬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사제에게 다음과 같이 권한다. "나처럼 여자들이나 품고서, 그 모든 미신의 허망한 궤변을 잊도록 해보게. 위선이 낳은 어리석은 착각들일랑 깡그리 잊어버리라고."


성애를 포함해 자연 그대로의 무위적 상태를 존중하는 싸드의 사상 속에는 우리 몸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적 쾌락에 대한 긍정 역시 담고 있다. 소설  <외제니 드 프랑발, 비극적 이야기>에서는 딸에게 종교, 도덕, 문학 등 윤리적 잣대를 가르치기를 거부하고 쾌락의 원리를 가르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 이들은 외제니를 성격 좋은 아이로 키우고 또 읽기를 가르치는 데만 전념했을 뿐, 흔히 그 나이 또래의 계집아이에게 반드시 교육해야 하는 종교적 원리나 윤리적 원칙을 가르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딸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며 인간에게 조금도 유익하지 않으며 공포에 떨게 만들 뿐인 그 따위 공상을 딸에게 심어주고 싶지 않다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 <외제니 드 프랑발, 비극적 이야기> 중


관능적 여체를 그린 프랑수아 부셰 <쉬고 있는 하녀>, 1751



싸드 후작은 왜 성적 쾌락을 종교적 구원보다 우선시했을까? 그는 타락한 자연이라는 가톨릭의 자연관을 믿지 않았다. 자연은 그대로 죄가 없다. 인간의 몸 역시 본래 자연적인 것으로 타락한 몸이란 없다. 행복은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쾌락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생명을 신의 뜻에 따라 해석하는게 아니라, 생명 자체를 목적 없는 우연한 개체로 바라보았기에 덧없는 삶에 대한 위안을 쾌락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연에 따른 본래적 행동이라고 보았다. 반항심 가득한 궤변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신 대신 자연을 끌고 들어와 우리가 가진 생물학적 쾌락,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한 즐거움을 긍정하면서 종교를 비판하는 지점은 계몽주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으면서도 훨씬 극단적이고 급진적이다. 싸드는 합리적 이성보다는 자연법칙으로서의 욕망을 윤리의 우선순위에 두었다. 비로서 우리는 싸드를 통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성과 욕망의 종합체로서의 인간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싸드 이전의 인간은, 가톨릭적 인간은, 반쪽 짜리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을 물질적 개체로 새롭게 정의하고 성을 단순히 번식의 도구가 아니라 쾌락의 선으로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으며, 또 육체를 기계론적 유물론으로 이해하며 '유기체의 신비'를 찬양했다는 점에서 기존 윤리에서 탈주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싸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학적 성애나 문란한 성관계는 그런 상상력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고 일종의 판타지 모티브였다. 견고한 신본주의 사회와 싸우고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기 위한 강력한 메타포이자 문학적 무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싸드의 작품 속에서 변태적 성욕만 본다면 우리는 그의 일부만 보고 오해한 것이다. 성은 자기에 대한 사랑이고, 자신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쾌락을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의 유물론적 무신론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싸드 <신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행>중 레즈비언 난교 삽화, 1797


싸드는 감옥을 전전하다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소설은 이리저리 찢기거나 암시장 속에 묻혔다. 하지만 인간 무의식과 욕망에 주목한 그의 소설은 20세기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의해 재발견되었고 이후 싸드는 프랑스 지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미셸 푸코는 <계몽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s Lumières?>(1984)라는 글에서 18세기 계몽주의가 비이성, 광기, 욕망을 타자로 규정하고 배제하며 이루어진 배척적 사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우리는 싸드를 불태워야 하는가? Must we Burn Sade?>(1953)라는 글에서 싸드를 "위대한 모럴리스트"라고 칭했는데 싸드의 글에서 여성의 성이 적극적으로 옹호되고 있고 이를 통해 고착화된 젠더에 대한 도전적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젠더의 사회적 결정론과 본래적 모호성을 지적한 보부아르에게 싸드의 소설은 참고할 만한 텍스트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합리주의 사상가들은 행복은 '이성적 사유'에서 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통해 이성이 가진 선한 가치에서 인생의 답을 찾았지만 싸드는 오히려 감각적 욕망에서 삶의 가치를 찾았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기 이전에 자연법칙에 지배받는 유물론적 존재라는 점. 이런 싸드의 유기체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8세기에 유행한 기계론적 신체관과, 프랑스 계몽주의자들 사이에서 관심을 끈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이었다.  


기계적 유기체와 신체적 감각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신의 목적이라고 본 가톨릭 사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거대한 기계장치로 해석한 진보적 사상이었다. 17세기 이후 급격히 발전한 과학혁명의 세기에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뿐만 아니라 생명 역시 물리 화학적 현상으로 파악했는데 18세기 초중반 줄리앙 드 라메트리(Julien Jean Offray de La Mettrie, 1709~1751)의 <인간 기계론 L’Homme-machine >(1747)과 같은 책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라메트리의 사상은 싸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물과 물질은 과학적 현상이며 그 현상의 결과물로서 자체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물질을 강조하는 이런 물활론적 또는 유물론적 사고는 인간과 자연을 물질적 차원에서 이해한 것으로 이성과 사고 역시 육체의 물질 작용에서 나온 것이라 보았다. 동일한 맥락에서 라메트리의 저서 <관능의 학교 l'Ecole de la Volupté>(1746)는 종교적 설명을 배재하고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은 욕망의 육체적 만족에 달려있다고 설명했다. 라메트리의 이런 유물론적 기계적 인간관은 자연스럽게 싸드를 비롯한 리베르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싸드는 감각을 규제하려 하는 구체제의 불합리한 관습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우리의 물질적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쾌락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지 생각했던 것 같다.


물질적 측면에서 인간의 감각이란 어떻게 해석되었을까? 왜 감각을 지닌 육체적 자아가 리베르탱 사상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가? 17세기 데카르트(1596~1650)는 이미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 이성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자 모든 것을 판단하고 굽어보는 초월적 존재로 규정했다. 그 자리에 육체 감각과 같은 불명료한 데이터는 설 자리가 없었다. 반면,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1632~1704)는 인식론을 다룬 저서 <인간 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에서 정신을 "텅 빈 서판 tabula rasa" 즉 백지상태로 보았고 외부에서 오는 여러 감각이 마음이라는 백지에 맺히고 그것을 반추(reflection) 하는 과정에서 인지와 지식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로크에게 이성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감각의 경험에 의해 생성된 후천적인 것, 그리고 지각과 사물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생긴 결과물이었다. 이것은 객관적 실체를 부정하고 주관적 시각을 강조하는 경험론적 사고인데 인간이 육체의 감각에 기반해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유물론적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 즉, 정신이나 영혼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며 단지 감각과 육체적 능력의 결과물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로크의 경험론은 기계론적 신체, 감각과 신체 물질성에 주목한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으며, 미술 분야에서도 샤르댕(1699~1779)과 같은 화가는 로크의 인식론을 알고 있었고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어른거리는 빛과 인상을 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회화의 감각적 요소를 강조하기도 했다.  


빛과 감각의 효과를 탐구한 샤르댕 <딸기 바구니>, 1761


모차르트와 다 폰테는 리베르탱인가?

그런데 이런 유기체적 감각과 방탕한 성애가 주목받던 시대에 <돈 조반니>를 작곡한 모차르트는 리베르탱이었을까? 아마도 모차르트 보다는 <돈 조반니>의 오페라 각본을 쓴 로렌초 다 폰테에게 그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베니스 출신의 사제이자 문인이었던 다 폰테는 카사노바와도 친분이 깊은 리베르탱이었다. 카사노바처럼 다 폰테 역시 사제의 윤리를 어기고 유부녀와의 추문으로 베니스에서 추방되었다. 비엔나로 도망친 다 폰테는 그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살리에리가 악장으로 있던 요제프 2세 황제의 오페라단 시인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모차르트와도 작업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이 브런치에 쓴 몇몇 글에서 17~18세기 '갈랑트' 문화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갈랑트'는 본래 상류 사회에서 남녀 사이의 연애와 예절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18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리베르티나쥬와 결합하여 저속한 남녀 관계를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어 버린다. 다 폰테와 모차르트는 음란한 '갈랑트' 문화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점에 <돈 조반니>를 작곡했는데 카사노바를 잘 알고 있던 다 폰테는 카사노바의 행색을 본 따 바람둥이 캐릭터를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 조반니>는 성애적 갈랑트에 대한 복합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전통적 사랑관과 개인주의적 낭만적 사랑관의 충돌이다. 남성인 돈 오타비오와 마제토는 전통적 결혼 관습에 대한 지지자이지만, 오페라 등장하는 3명의 여성들은 남성들의 관습에 반하는 급진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돈나 엘비라는 사랑의 정념을 대표하고, 돈나 안나는 강간의 위험에 처했던 희생양이며, 체를리나는 타락한 '갈랑트' 밀당을 주고받는 캐릭터다. 남자 vs 여자 캐릭터를 통해서 <돈 조반니>는 전통적 결혼과 자유주의적 사랑, 그리고 낭만적 사랑이라는 탈을 쓴 음란한 성애 등 모든 애정의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다. 동시에 여성의 욕망과 정념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급진적 젠더 감성까지 담고 있다.


그 사회적 현상의 바탕에는감각에 대한 긍정과 그것에 기반한 쾌락에 대한 인정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여성의 쾌락을 인정하고 남성 캐릭터들이 지향하는 전통적 사랑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했듯이 싸드를 비롯한 리베르탱의 젠더 관념은 보부아르와 같은 여성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젠더와 계급에 대한 이런  급진적 생각이 비엔나 상류층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어 1787년 비엔나에 인쇄된 <돈 조반니> 악보에는 논란의 장면들이 삭제되어 출판되었고, 오페라의 초연은 비엔나가 아닌 프라하에서 이루어졌다. 오페라가 초연된 2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리베르탱들의 사상은 단지 방탕한 성윤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과 성별을 넘나드는 '자유'에 방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zB6hXEMV50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재현된 돈 조반니의 최후. 회개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돈 조반니가 지옥으로 떨어진 후 4명의 등장인물이 나와 "이것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최후이다. 죄인의 죽음은 항상 그의 삶을 반영한다."라고 훈계하는 장면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리베르탱 사상과 신본주의 사상의 긴장관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관습과 개혁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회적 검열을 피하기 위해 집어넣은 교훈적 장면이었던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계몽주의자, 리베르탱, 싸드 후작, 모차르트, 다 폰테는 모두 18세기 구체제에 대한 비판과 붕괴를 예견한 예술가로 볼 수 있고 그 시대에 이미 이들의 비판적 망탈리가 사회 구조 속에 깊숙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망탈리떼는 이 글에서 언급된 파리, 베니스, 비엔나, 프라하 등을 포괄한다.


돈 조반니와 모차르트의 삶 사이에서도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모차르트는 난봉꾼은 아니었지만 오만하고 자유분방한 음악가였다. 자신의 외부 활동을 제한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의 갈등 끝에 궁정음악직을 사직하고 프리랜서 신분으로 비엔나로 떠난 개인주의자 모차르트는 주교에 봉사하는 음악가, 고용자와 피고용자라는 봉건적 주종관계를 떨쳐버리고 음악가 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막강한 교회 후원자를 져버린다는 것은 개인의 능력으로 헤쳐나가야하는 환경을 의미한다. 또 모차르트는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파티, 술, 여행을 즐기며 소비 지향적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자유주의자 모차르트의 삶은 성애를 제거한 돈 조반니의 삶과도 유사했을지도 모른다. 자유를 과시하고 대주교로 대표되는 권력에 도전한 모차르트의 행동은 또한 리베르탱의 행동과도 닮아 있다. 또 한가지는 그가 1784년에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헀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비밀단체는 계몽사상을 받아들이고 인도주의와 박애주의를 가치로 내세우며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체제 비판적인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 폰테와 같은 리베르탱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계몽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야흐로 유럽은 구습의 전통적 결혼 대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낭만적 결혼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성과 사랑 풍습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이성 대신 감각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과학혁명의 시대 속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시대 속에서 수많은 철학자, 음악가, 소설가는 사랑과 삶에 있어 무신앙적 자유주의 사상을 공유했다. 그중에서 싸드 후작은 단연 그 극단에 서 있었던 인물이고,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싸드적 인간관을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게 표현한 음악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6dXiybqMpo

돈 조반니의 유혹하는 세레나데 <오, 나의 창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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