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해야만 하는 이야기
사람들에게 외면받지만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한 후에 미뤄두었던 오래된 다이어리를 들춰보았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던 키워드가 '선감학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싶었고 '사회적 낙인'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어쩌면 선감학원보다 더 생소하고 내 삶과 동떨어진듯한 낙인이란 단어가 우리 내 삶 곳곳에 잔존하진 않을까? 곁눈질하는 마음으로 나를 둘러싼 사회를 면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참 많았던 학창 시절이었다. 위계로 인해 강제적으로 부여받은 꼬리표부터 스스로가 만들어낸 꼬리표까지. 그 색도 모양도 각양각색인 것들로 인해 스스로 도망치거나 때로는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었다.
그 누가 낙인을 달가워할까. 한번 지져진 낙인은 그 흔적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선감학원 터를 처음 찾은 건 지난해 가을의 초엽이었다. 대부도와 인접해 있는 선감도는 그 어느 곳보다 평화로운 곳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 바다 그리고 고요한 섬. 해설사님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이곳에서 자행된 40여 년간의 아픔이 더 없는 비현실로 막을 내렸을 것만 같다. 굽이굽이 길을 따라 목적지인 선감학원 옛터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목도한 녹슨 이정표가 덧없는 세월을, 그리고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아우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정의 끝,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선감학원 출신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며, 그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었다. 그분께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고 그가 준 답변은 내가 할 수 있는 길로 나를 인도했다.
"우리가 다 죽고 나서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기억해 주면 좋겠어."
당시의 선감학원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선감학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술이 허용하는 범주 아래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겠지만, 포럼연극에서 만큼은 그보다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들이 선감학원을 퇴소한 이후의 이야기. 퇴소한 이후 우리 내 삶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이야기. 그 삶의 도처에 놓여있는 허점투성이의 빈틈을 매워가며 살아낸 이야기를 포럼연극이란 이름 아래 하고 싶었다. 그렇게 '방과 후 소년'은 탄생했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기억의 방식이었다.
퇴소 후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관객의 참여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포럼연극 특성상 공연을 관람한 관객은 곧 배우가 된다. 소위 관객-배우(Spec-Actor)라 불리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공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던져진 주제, 키워드,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야 한다. 즉, 내 삶의 이야기로 쉽게 치환될 수 있어야 하며, 그 순간 발현되어 터져 나오는 자발성이 포럼연극을 완성시켜 준다. 논쟁(Debate)이 아닌 논의(Discuss)의 장이 될 것이라는 확신.
포럼연극은 자료 수집과 피해자 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작한다. 관련 서적, 기사, 영상 자료 및 인터뷰 한 내용을 바탕으로 큰 갈래의 줄기를 잡고 에피소드 중심의 사건을 구체화시킨다. 억압자(Depressor)와 피억압자(Oppressed) 그리고 조력자(Helper)와 방관자(Bystander) 끝으로 잠재적 조력자(Potential Helper)까지 포럼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의 인물 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그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누구라도 위의 다섯 가지 인간 군상 중 하나에 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포럼연극의 힘이자 동시에 매력인 것이다.
포럼연극 '방과 후 소년'에서는 두 명의 피억압자가 등장한다. 김이제와 이명세. 이들은 태어난 시간도, 살아간 환경도, 만나고 스쳐간 인연도 모두 다르지만, 낙인이란 이름아래 상호 간 공감대를 형성해 간다. 그들은 상처받은 외부로부터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애써 외면하고 덤덤하게 살아가고 싶지만, 버둥거릴수록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만들어진 감옥 안에 더욱더 깊숙이 갇힌 신세가 된다. 연극은 한 학교의 교직 사회를 배경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낙인' 그리고 '편견'과 '차별'을 거침없이 보여주며 그 어떠한 해결방안이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채 막이 내린다. 안티 클라이맥스(Anti-Climax). 일반적인 연극에서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극적 상황의 해결이 감정의 해소를 도와준다면, 포럼연극의 안티 클라이맥스는 그러한 감정의 해소를 단박에 거세하며 숨 막히는 긴장감 아래 놓아둔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조커(Joker)이다.
조커(Joker)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조력자, 협력자, 촉진제 역할을 하며 극이 종료된 이후의 상황을 관객들과 소통하며 후속 활동을 진행한다. '폭력, 낙인, 편견과 차별이란 단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야기 속 주인공을 조금 더 안전한 상황에 놓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조커는 훌륭한 경청자이며 동시에 광대이다. 조커는 지지자이며 도전적이고 때론 비판적이다. 조커는 활기차고 솔직하며 때로는 열정적이지만 인내심이 있다. 조커는 교훈적이지 않으며 명료하고 결정적이지만 민주적이다. 조커의 책임은 자신의 의도를 가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검토되는 문제들에서 명확성을 찾는 것이다.
조커는 깨어있고, 인식력이 높으며, 경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포럼연극 공연 중 관객이 관객-배우가 되었을 때 조커는 캐릭터와 상황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조커가 되려면 내면의 속삭임 또는 내면의 억압자를 솔직하게 살펴보고, 자신이 집착하거나 비교하는 것으로부터 섣부른 판단을 하거나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조커에게는 부정적인 측면을 긍정적인 속성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은 자기 탐구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의 속삭임을 제거하기 위한 지속적인 성찰은 효과적인 조커가 되기 위해 중요하며, 관객과 지역 사회가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중요 요소가 된다.
공연이 끝난 후 불편한 상황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연극은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된다. 개입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용기이자 모험이다. 개입을 시도하는 관객은 자신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를 실천하며 이야기 속 주인공의 부당하고 불편한 현실을 조금 더 안전하고 지지받는 환경으로 바꾸고자 시도하는 존재이다. 이상적인 상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예상 밖 상황들은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허탈감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인생이란 것을 안다.
포럼연극이 기존의 일반 매체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특정 상황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뀌거나, 균형 잡힌 개인이 된다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마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포럼연극의 개입된 상황에선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법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관객의 개입으로 시도되는 모든 것들은 쉽지 않지만 가치로운 도전이며, 그걸 바라보는 또 다른 잠재적 조력자인 '나'는 앞서 보여준 용기 있는 시민의 참여를 통해 다른 아이디어를 모색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작은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슬픔과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비록,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품은 채 일상으로 돌아갈지라도 그 마음이 딛고 선 땅을 갈아엎고 퇴비를 뿌려 희망의 씨앗이 뿌리내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럼연극 '방과 후 소년'은 발칙한 시도이며 동시에 과감한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모험을 떠나는 마음으로 함께해 준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포럼연극 '방과 후 소년' 스케치 영상
https://youtu.be/kN_AQ8quAzs?si=yxdZjAt5hFOeQN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