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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Nov 02. 2023

방랑의 계단

원하면서 원하지 않는 마음

주말 오후 그는 등산을 간다고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마음이 불안하고 화가 났다. 읽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감정이 흔들렸다.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화가 났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의 행동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감정의 이유를 읽을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인데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웠다.


그에게 쌀쌀맞고 차갑게 굴면 왜 그러는지 무슨 일 있는지 궁금해하고 살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마지못해 울면서 마음을 털어놓고 품에 안기면 되겠지' 뻔하고 흔한 장면을 떠올렸다. 내면의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타협하면서 서둘러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려 했다. 겉보기에는 마음을 털어놓는 반응이었지만 속마음은 그의 보살핌을 원하고 있었다. 의존이라는 익숙한 방식에 순응하려고 했다. 순간적으로 솟구친 무의식적 충동이 나를 무력하게 했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내 감정을 살피지 않는다. 궁금해하지 않고 외면한다. 그런 태도에 혼자 약이 올랐다. 내 감정 따위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는 그와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무너지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다시 나를 내어주려 했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모욕에 나를 맡기지 않겠다고, 경계를 세우고 침범하지 않게 나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서는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온몸으로 외롭다고 당신에게 기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쓸쓸한 침묵으로 날 선 목소리로 나를 그에게 드러냈다. 그가 눈치채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스스로를 오갈 데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여자로 만들었다. 의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 원하지 않는 마음, 그 모순적인 마음에 당황했다. 의존하려는 나와 의존하지 않으려는 나가 팽팽하게 맞섰다. 익숙하지 않은 방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편해서 타협하고 싶어졌다. 우리라는 보호막 속으로 돌아가 안주하고 싶은 마음, 충족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의지하려는 마음, 손쉬운 방식으로 불안을 지우려는 마음,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착각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 그것에 갈등하고 있었다. 원망하면서도 원하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바라는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하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막막한 불안,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버림에 대한 공포를 피하려고 나를 돌봐 줄 사람을 찾았다.


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자아분화가 느렸다. 그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불안하고 불쾌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관계에서 생긴 충돌과 대화로 나의 불안을 눈치채고 있었다. 잦은 술자리, 친구들과의 만남, 육아와 가사에 무심함, 내 욕구에 개의치 않고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그를 볼 때마다 감정이 흔들리고 요동쳤다. 그렇게 나는 끊임없이 같은 상황에서 걸려 넘어졌다. 내가 원하는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울고 소리치고 화내고 애원했다. 내 요구를 수용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감정을 쏟아부었다. 불필요한 감정 낭비였다. 상대에 대한 기대감은 높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충족하지 못했다. 일방적이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나의 욕구가 틀어질수록 관계의 주도권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보살핌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억울하고 분한 표정을 하고 씩씩대기만 했다. 계속해서 상대를 의식하면서 원망과 분노를 끄집어냈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참다가 분노를 폭발하는 방식을 반복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분노와 체념을 오갔다.


왜 이렇게 못났을까? 왜 그에게 원하는 돌봄을 받을 수 없는 걸까? 자기 수용의 초점이 상대에게 집중될수록 못난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면서 위축됐다. 한 사람을 향한 애정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악순환이었다. 자기 자신을 수용하지 못해서 타인에게 칭얼대기만 했다. 고독감을 피해서 의존하는 행동이었다. 마음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부정적인 방식을 반복했다. 스스로를 빚쟁이처럼 여기며 결핍감과 공허함을 메우려고 했다. 자아에 대한 밑천이 없어서 나라는 사람이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행위를 통해, 일에 몰입하며 성과를 내는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확신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 것에도 만족하고 집중하지 못했다. 안온하고 조심스러운 삶으로 충분했다. 지만 만족 없는 부정에 치우쳤다. 나를 홀대하고 박하게 굴었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원하면서 그것과는 반대되는 관계에 옭아매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애써서 바꾸고 살펴야 할 것은 우리라는 관계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였다.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내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관계에 매달리며 나를 내던졌다.  감정을 의심하며 지쳐갔다.  가치를 내가 인정하지 않았다. 초점을 나에게 맞춰서 나를 소진시키는 관계의 악순환을 끊어야 했다.


관계에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공존한다. 만남과 회피 만남을 원하지만 거절이 두렵고 회피하지만 외로움은 물리치고 싶다. '밥 한번 같이 먹자, 나랑 같이 밥 먹자'는 말을 꺼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은 별 볼 일 없으니 상대방은 에둘러서 거절하고 말 거라는, 다른 근사한 누군가와 즐거운 시간을 약속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한다. 사람들 사이에 소소한 감정을 툭툭 표현하는 것이 어려워 감정을 숨긴다. 관계에 구애받지 않는 쿨한 사람인 척한다. 수용과 거절, 절반의 확률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부정적인 결말을 확신한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가 나 스스로를 이렇게 하찮게 여기게 된 것일까?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신념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었다.


어쩌면 나는 체육관에서 채우지 못한 관계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과 몸과 몸을 맞대면서 입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지만 생기 넘치는 사람이라고 여분의 에너지를 쏟아 낼 곳이 없어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찾으려 이곳에서 헐떡이고 있노라고 몸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목을 조르고 팔을 꺾고 다리를 밟고 몸을 짓눌러도 괜찮은 곳에서 나는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는다. 타인에게 다가서는 낯설지만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말없이도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도하지 않아도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있고, 의도한다고 해도 상대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너와 나 사이에 숨어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몸으로 익히며 타인과의 관계를 배운다.


일하는 엄마의 삶과는 다소 동떨어진 전혀 다른 공간, 체육관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머무름에 해방감을 느낀다. 체육관이라는 어딘가 도망치고 쉬고 망가질 곳이 있다는 것이 안도감을 준다. 모두들 자기 삶을 살면서 힘껏 땀을 흘리고 몸을 움직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조금 더 힘껏 살아가야겠다는 의지와 조금 더 버텨볼 기운을 얻는다. 손을 마주치고 인사하며 서로를 격려할 때에 낯선 이들의 좋은 에너지가 손을 타고 전해진다. 서로에게 힘을 주는 취향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나를 일으킨다. 구질구질한 일상도 뒤죽박죽 엉켜진 감정도 멀찍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덤덤하게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거친 움직임으로 나의 시간을 채운다.


체육관을 나서면서 느끼는 홀가분함, 묵은 먼지를 털어낸 듯 내 안에 조각난 어둠을 떨어져 나간 가벼움, 비어낸 그 자리에 작은 등불이 켜지고 마음에 빛이 든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더 깊은 내면의 감정이 궁금해진다. 몸을 움직이며 내 마음의 흐름을 느끼고 나를 돌보는 방식을 배운다. 나는 지금 인생의 체력을 기르며 궁극적으로는 내 안에서 편안해지는 내가 내 편이 되어가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나에게는 나를 위한 더 많은 시간과 고독이 필요하다.



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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