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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Nov 08. 2023

상처를 각오해야 하는 관계

사랑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우려던 막내가 속이 안 좋다며 먹은 것을 게워냈다. 그 뒤로 두 번 아이는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 쓴 물을 뱉어냈다. 화장실 바닥과 침대의 이불과 아이의 옷이 엉망이 되었다. 잘 놀던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고 아프기도 하는 일이 있었지만 먹은 것을 연속해서 쏟아내는 건 당황스러웠다. 주말 저녁이었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당황한 건 작은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빠에게 전화를 해도 되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그러라고 대답했다.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막내를 씻기고 난장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빠가 지금 뭐 필요한 일 있냐고 하는 데? 자기가 필요한 일이 없는 데 왜 전했냐고 하는 데?"  아이는 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빠의 말을 전다. 뜨거운 물로 화장실 바닥을 벅벅 문지르며 토사물을 정리하던 나는 벌떡 일어나 이 손에 들린 전화기를 가로챘다. "필요한 일이 없으면 전화하면 안 되는 거야? 막내가 토를 했다고? 그게 할 말이야? 내가 쓸데없이 전화했네. 잘못했네. 필요한 일 없어" 붉어진 얼굴이 한껏 아올랐다.


흩어진 화장실과 침대를 성급하게 마무리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속을 비워 낸 아이는 기운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상황이 종료되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비릿한 냄새가 남아있는 화장실을 마저 정리하면서 지난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첫째가 7살 둘째가 4살 즈음이었다. 늦은 밤 잠들었던 첫째가 잠이 깨서는 먹은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유치원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시끄운 소리에 잠이 깬 둘째는 겁에 질려 울면서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이는 쓴 물을 뱉고는 지쳐 쓰러졌다. 열에 들뜬 아이를 업고 대학병원 응급실을 가기는 했었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정신없고 산란한 와중에 불안에 떠는 두 아이를 번갈아 품에 안다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토사물을 정리했다. 겁이 났고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몰라 그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의 그는 아이 아빠가 아니었다. 낯선 타인이었다. 소음과 흥취에 둘러싸여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중얼거렸다. "뭐 그러기도 하는 거지. 괜찮아. 뭘~ 그런 거 가지고 전화를 해. 아빠 좀 이따 갈게."  그러고는 새벽이 되어서 돌아왔다. 날 밤 나는 아이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간 그를 보았다. 앞으로도 그와 벌어진 거리는 줄어들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잠든 그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 사로잡혔다. 미친 듯이 사랑한 그를 미친 듯이 저주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황당한 일을 겪을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각오하지 못한 채 닥친 마음이 아파서 밤새 나를 저주하고 우리의 비틀어진 관계를 원망했다.


요즘 나는 나이차가 한참 벌어진 막둥이를 돌보면서 멀찍이 서서 뒤짐을 지고 있는 그를, 달라지지 않는 그를, 매일 저주했던 10년 전의 그를 다시 발견한다.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고 나아가지 않아서 나를 아프게 했던 그의 말과 행동이 떠오른다. 사과받지 못한 수많은 순간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감정으로 남아 제자리를 맴돌고 나를 붙잡는다. 비슷한 상황에 닥치거나 같은 말을 들으면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10년 육아동안 쌓인 분노와 불만이 내면에 응어리져 있었다. 작은 사건에도 흩어져 버린 불확실한 감정들이 주체할 수 없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일들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럴까? 10년 전 일인데 선명해서 어떤 게 지금 마음인지 헷갈렸다. 정신없이 아이를 키웠던 시간에는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소리를 낸다. 그때는 마주할 힘이 없어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수용할 용기가 없어서 덮어두기만 했었던가. 왜 이제야 터져 나와 혼란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했던 걸까? 우연치 않게 생략된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가만히 더듬어본다. 내 감정을 더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수없이 읽고 고쳐 쓰며 마음을 되풀이다. 살피지 못해 가리어지고 얽힌 마음속 갈피를 찾아간다.


나는 억울했고 서러웠다. 아이와 함께 번잡 일상을 헤쳐가는 일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수 있을까?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를 떠올렸다. 그는 우리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아이들은 그의 한 조각이었다. 아빠와 닮은 표정과 닮은 몸짓에서 나는 그를 느끼고 그리워했다. 아이에게 기울어지는 마음은 그를 사랑하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랑을 돌보느라 혼자서만 애쓰는 날이 이어지니 억울했다. 내내 한 방향으로 흐르는 마음을 외면하고 겉돌기만 하는 그에게 분노가 쌓였다.


그는 시간을 유예시키며 기다림을 강요했다. 조금만 봐주면 이것만 끝나면 이것만 마치면 될 거라고 했다. 우리는 그의 우선순위에서 자꾸만 밀려났다. 그는 우리를 밀어내며 잡을 수 없는 것을 쫓아 허우적거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를 밀어내고 아이와 눈을 맞추고 같이 웃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벗어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방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와 동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함께 웃고 울고 싸우고 도왔다. 아이들의 해맑은 마음은 위태로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아이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돌봄과 살핌을 반복하며 고립되어 갔다. 그의 사정을 믿고 헤아리면서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낯설고 서툰 육아라는 일상 속에서 자주 지치곤 했지만 의지할 곳이 없었다. 무관심과 비난으로 회피하는 그를 맴돌았지만 공감받지 못했다. 그는 친절과 희생을 먹고 자라는 괴물 같았다. 참으면 참을수록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악랄해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꼼짝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를 두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하는 관계는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우리는 같이 있어도 편안하지 않았고 쓸쓸했다.


어느 때인가부터 그의 안정적인 경력을 위해 내가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세계가 확장되는 동안 나의 세계는 집안으로 좁아다. 내 이름을 걸어서 만드는 세계는 저만치로 멀어져 갔다.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만족하지 못했다. 무언가에 강하게 짓눌리듯 숨이 조여왔다. 나는 종일 아이들 곁을 제자리 걸음하듯 맴돌고 있었다. 불안했다. 그는 멈춰선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의 도전을 의심하고 불안을 외면했다. 그가 목표점을 향해 바삐 걷고 있는 동안 나는 그 맴돌면서 소외감을 느꼈다. 집안에서 종종거리다 인생이 끝나버리고 말 거라는 공허감이 밀려왔다. 육아와 살림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상이 계속되었지만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공감받으려고 의지하다 상처받고는 쉽게 용서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그마저 기댈 수 없다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상대방의 반응에 의지해서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그의 싸늘한 시선 아래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노하고 저주하는 내가 초라하고 시시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장과 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뻔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음만 앞섰을 뿐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 아이의 엄마, 나를 살게 하는 그것이 내 발목을 붙잡는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다.


글을 쓰는 것은 무해했다. 육아와 밥벌이에 매여있어도 가능한 일이었다. 여건과 상황이 도와주지 않아도 종이와 필기구만 있으면 가능했다. 아이들의 소란을 피해서 회의의 지루함을 넘어서 나는 금세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곳저곳에 끄적인 조각난 글들을 이어 붙이고 정리하는 동안 투명해지고 가벼워졌다. 작가라는 이름은 여전히 나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일상과 마음의 조각이 글이 되는 것이 나를 설레게 했다. 하나의 글을 쓸 때마다 하나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딱딱하게 뭉쳐진 묵은 마음을 밑바닥까지 긁어내고 털어낼 수 있었다. 아이가 잠들 때마다 읽던 내가 쓰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오늘도 소란스럽기는 하나 갈 곳 잃은 마음을 흰 종이 위에 내려놓는다. 고 쓰는 일이 숨 쉬는 것만큼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말로 상처받고 글로 위로받다.


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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