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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 3교시 쉬는 시간. 교실 뒤 거울 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뿔난 표정과 대치상황, 웅성거리는 주변 아이들 틈으로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쉰 뒤 나는 무슨 일인지 묻는다.
평소에 이름이 거의 불리지 않는 여자아이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름이 불리는 남자아이가 내 앞에 섰다.
심각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는 두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늘 그렇듯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묻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진지한 문제일터라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중재를 시작한다.
모둠 활동을 하자고 했던 상황인데 남자애 속눈썹이 눈으로 들어갔단다. 따끔거리고 아파서 거울을 보고 속눈썹을 찾고 있었는데 눈에 뭐가 들어가서 아프다는 목소리가 웅얼거렸고 이게 잘 들리지 않아 뭉그적거리는 줄 알고 거울 그만 보고 이리 오라고 했던 여자애의 말이 남자애는 서운했던 거다.
남자애가 한껏 억울한 목소리로 자기 입장을 말한다.
“제가 속눈썹이 길어서 눈에 자주 들어가는데요...”
나는 억울함과 서운함이 온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그 남자아이에게 속눈썹이 눈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빼면 되는지와 그래도 아프면 보건실을 이용하면 된다고 신속하게 해결책을 제시한 후 서로 간에 무례했던 언행을 반성하게 하고 쌍방 사과를 시킨 뒤 돌려보냈다. 평소에 나를 힘들게 했던 탓일까,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버리고 싶어서였을까? 저 말에 한 번 웃어주고 남자애의 속눈썹을 유심히 보며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줄 수도 있었을 법한데 그 아이에게 잔뜩 지쳐있던 그 날의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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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해에 새로운 동학년 선생님들과 새로운 아이들을 맡는 일은 늘 설레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반을 고르고 아이들의 명단을 보며 올해의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촉을 세워보지만 각양각색의 이름들만 가지고는 어떤 아이들이 모였는지 알기가 어렵다. 비고란의 정보도 나에게는 부족한 느낌이다. 겁이 많은 나는 아직 아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 다른 선생님들께 가출석부를 내밀며 올해의 우리 반은 어떤 반이 될지를 미리 가늠해본다.
개중에는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이미 나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학생도 있고 지난날의 명성이 자자해서 나의 걱정을 더해주는 학생도 있다. 이 사전조사작업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짧은 경력이 못미더운 탓에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더 가출석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작년 선생님들께 자문을 구할 것 같다. 하긴 새학기, 새로운 반을 만나기 전 아이들도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이리저리 수소문하기도 하니까.
올해의 사전조사에서는 그 남자애가 나의 걱정을 더해주는 아이였다. 내가 직접 겪어보면 될 일을 나는 굳이 물어물어 걱정을 뭉게뭉게 쌓고서 일 년간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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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처음 봤을 때 나는 하이에나를 생각했다. 작고 날렵한 몸에 차갑고 매서운 눈매, 보호자로부터 받았어야할 애정과 보살핌이 충분치 않아서 풍기는 불안함과 엉성함. 4학년인데 아직 구구단을 다 외우지 못했다고 너를 소개했던 개학 첫날부터 내가 겪었던 너는 네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었다. 상위 포식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하이에나랄까. 너는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악다구니와 깡다구 그리고 거친 말과 행동들로 너를 감싸며 다른 친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너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나는 너에게 쓴소리와 잔소리를 쏟아가며 이러다가 내가 하이에나가 되는 건 아닐까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랬던 네 이름이 요즘은 예전만큼 많이 들리지 않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맵고 짜고 쓰디 쓴소리에는 꿈쩍도 않던 네가 불량식품이 주는 짧고 가벼운 단맛처럼 간간이 먹을 수 있는 나의 얕고 가벼운 칭찬에 맛을 들인건지 욕의 어원과 의미를 생각해서 쓰면 안 되겠다고 마음 먹었던 건지 어찌한 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부푼 쓰레기가 넘칠 것 같은 쓰레기통 안으로 아예 들어가서 온 체중을 실어 쓰레기를 압축시키며 나를 힐끔힐끔 보는 네 눈을 바라보며, 깨끗하게 싹싹 긁어먹은 식판을 자랑스럽게 들고 나를 향해 우물쭈물하다 가버리는 너를 보며 나는 너를 송곳니 빠진 하이에나 정도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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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욕을 했다는 얘기를 모처럼 전달받고 아이들이 하교할 때 너를 불러세웠던 참이다.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고 재차 묻는 내 말에 너는 유튜버에게서 들었다고 답했다. 하루에 유튜브는 얼마나 보는지, 부모님이 그만 보라고 하지 않는지를 물은 건 내 잘못이다. 그 정도의 보살핌이 있었다면 네가 하이에나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너는 아무도 그만 보라고 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덜컥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욕인지 몰랐던 거니? 그걸 일일이 다 알려줘야 아는 거야?” 이전에도 자주 쏟아냈었던 답답한 마음을 구구절절 토해놓으려던 생각을 멈췄다. 네가 하루 이틀 들어본 얘기가 아닐 말을 흘려보내려다 ‘굳이’ 싶어 입을 다문다. 하루 이틀만 들어봤을까, 올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저런 말을 쓰는 이 하이에나를 선생님들이 가만히 두셨을 리가 없다.
한 번도 온전히 믿어본 적 없던 네 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한다. 너는 홀로 있는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고 가장 접하기 쉬운 유튜브에 들어간 것뿐이다. 봐도 되는 콘텐츠와 보면 안 되는 콘텐츠를 배우지 못했을 뿐이고 유튜버들이 하는 말을 써도 되는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너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말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유튜브 이용 제한 시간과 콘텐츠를 제한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던 네 말에 나는 괜히 뒷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연다.
“네가 너를 지켜야지.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이 지켜주시기도 해. 그런데 너희 엄마는 바빠서 그러시기 어려우시잖아. 그러면 네가 너를 지켜야지. 네가 너를 아프지 않게 해야 해.”
마음을 뒤져서 찾은 말을 겨우 늘어놓고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인지를 네 표정에 달아보며 내 입술은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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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악다구니와 거친 말들로 친구도 자기도 다치게 하는 일을 멈추려고 노력하면서부터 부쩍 눈물을 보이는 날이 많아졌다. 눈빛도 ‘나를 건들지 마’와 ‘저를 사랑해주세요’ 사이 어디쯤, 애처로움이 묻어나는 것 같다.
이제 흔들리는 이빨을 몇 개 가진듯한 이 작은 하이에나는 거친 말을 이용하지 않고 친구들 사이에서 자기를 지켜내려다가 원치 않는 상황이 닥쳐올 때 왈칵 울음을 쏟는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을 미처 훔쳐내지 못해 눈물바다가 된 얼굴로 나를 마주한다. 문득 바라본 아이의 속눈썹이 눈물에 축축하게 젖어 비 맞은 머리칼 같은 긴속눈썹이 눈을 덮어버려 보는 이의 애처로움을 더한다.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면서 바라보는 그 아이의 긴 속눈썹 뒤로 낙타가 보인다. 낙타는 사막 먼지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다지. 아무리 작은 먼지도 눈에 들어가면 대들보 들어간 것 마냥 아픈 법이라 너도 먼지같은 작은 말에도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너를 보호하려고 날카롭고 긴 속눈썹을 갖게 된 걸까.
처음 널 만났을 때 보이지 않았던 너의 속눈썹이 이제 와서 보이는 건 왜일까.
혹 내가 너의 속눈썹을 자라게 했던 건 아닐까.
“제가 속눈썹이 좀 길어서요 눈에 자주 들어가요.”
했던 네 말이 머리에 윙하고 울린다. 너는 아마도 낙타였을거다. 이 곳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너를 지키려다보니 네가 낙타인지 하이에나인지 너도 분별이 어려워졌으리라. 네가 아팠던 만큼 너를 지키려는 네 속눈썹은 길어져서 오히려 너를 아프게 하는 동안에도 너는 홀로 너를 지켜오며 스스로를 하이에나로 여겨왔던 것이리라.
이제는 더이상 악다구니와 거친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고 연약한 하이에나가 혹은 낙타가 혹은 그 둘 사이의 어디쯤 되는지 모를 존재가 내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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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애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완전히 습득하길 기다려야 한다.
낙타는 사막에서 사는데 네가 사는 이곳은 사막이니, 아니면 정글이니. 네가 느끼는 이곳은 어떤 곳이니.
네 눈에 눈물이 마르면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어떤 먼지 바람에도 너를 보호할 수 있는 낙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리라 마음먹는다.
우리 반에는 낙타가 산다.
속눈썹이 긴 낙타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