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룬드 Oct 26. 2021

평범한 인생에서는 마주하지 않을 결혼

설거지론에 대하여

삐쩍 꼴았던 안경잽이가 써봅니다.

필자는 10년도 더 전부터 나무위키의 전신인 리그베다위키를 사용해 왔다. 단순한 위키지만, 워낙 방대한 내용과 이용자들을 담다 보니 트래픽 부담을 어떻게 메꿀지 궁금해 왔던 부분이 있다. 수익 모델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최근 들어 네이버나 다음 등에서 사라진 검색어 순위라든지, 뉴스 제공(댓글이 자유로운)이라든지 하는 서비스라든지 하는 것들이 수익 모델 창출의 방법이겠거니 하며 별 불만 없이 이용하고 있다.


최근 며칠간 '설거지론'이라는 문서가 검색어 순위 꼭대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문서가 짧을 땐 흔한 여혐 밈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필자가 즐겨보는 롤드컵 경기가 끝난 뒤에도 쉽사리 내려오지 않아 다시 한번 들어가 봤는데, 문서 자체가 엄청 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링크도 수십 개가 달려 있었다. 엄청나게 자극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돌고 돌던 이야기가 정립된 것뿐인데, 제대로 반박이 불가하다는 식의 반응과 함께 젊은 층에서 설득력을 얻어 그렇게 인기가 좋은 모양이다. 일간지에는 관련해서 기사도 실린 모양.


처녀성 등과 같은 질낮은 주제들을 배제하고 설거지론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젊은 시절(20대 초중반을 뜻한다.) 매력적 인물들과의 연애경험이 많은 여성이 혼기가 차며 미래를 고민한다.

2. 젊은 시절 경제력 및 외모의 부재로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남성이 혼기가 차며 경제력이 상승한다.

3. 여성은 1의 이유로 2의 남성을 만나 짧은 연애 후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한다.

4. 사랑의 부재는 아내에서 남편으로의 착취로 이어지며 이는 불평등한 결혼생활을 초래한다.


재미있는 내용이고, 섣불리 반박하기에도 쉽지 않은 연역적 완결성을 가진 듯하다. 2번을 보면 완전히 필자의 이야기이다. 삐쩍 꼴은 멀대의 외모를 가진 본인은 학창 시절 연애를 할 만한 경제력도, 자존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도 돌이키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저 시절을 보낸 필자는, 15년이 지난 지금 금쪽같은 아내와 은쪽같은 아이 둘을 키우며 비교적 균형 잡힌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본 필자의 의견과는 달리 필자의 부인을 보살로 칭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무엇이 차이일까.


개인적으로는 사회과학을 과학으로 부를 수 있느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데, 과학이라 함은 어떤 가설과 이론을 정립시키는 데에 엄격한 검증을 필요로 한다. 자연과학계에서도 그러한 검증에 수많은 오류들을 품는 경우가 많아 왔는데, 인문사회학에서는 오죽하겠는지. (최근 읽은 서적인 블랙 아테나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기원에 대한 근대인들의 '과학'적 접근에 대한 회의가 가득하다. 어떠한 접근 방식도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다면, 이데올로기를 인정하고 과학이라는 환상을 버리는 게 현명하다는 저자의 입장에 많이 동감한다.) 그만큼 현상을 단순화시키는 모델을 만드는 것은 굉장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위의 도식은 너무나 단순함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단순한 만큼 자체적인 완결성은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해당 도식이 성립하는 집단 폭이 너무나 좁다. 그래서 나무위키의 해당 문서에는 설거지론의 피해자인 '퐁퐁남'에 당도하는 알고리즘도 있다. 이 알고리즘은 꽤나 자극적이라 싣지 않겠지만 그만큼 관심을 확 끄는 면모도 있다. 결국 퐁퐁남에 당도하기 위한 알고리즘의 존재 자체가 위 '설거지론'이 많은 결혼가정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적 완결성은 지니고 있지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다수를 설명할 수 없는 가설이라면, 다수가 굳이 열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본인 이야기가 아닌데 왜 본인이 환호하는가.


통계로 일반론 여부를 살펴보자. 모 설문에서 중매결혼 비율이 38%라고 한다(2-30대 비율을 보면 5%를 찍는다.). 이것이 소개팅을 더한 비율인지 제한 비율인지 알 수 없지만, 중매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다 '퐁퐁남'일리도 없으니 결국은 과반수가 안 되는 지점에서 설거지론에 대한 논의가 시작돤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필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외적인 조건이야 위에 딱 들어맞는 학생이었지만, 인생이 저런 흐름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연애도 못하며 대학과 집 사이에서 자괴감에 빠져 썩고 있던 필자의 학창 시절이라고 해도, 단순히 경제력이나 외모의 상승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밤을 새워서 영업하는 홍대 클럽 문턱이야 한 번도 못 가봤지만 10시면 공연이 끝나는 허름한 라이브 클럽은 꽤나 여러 번 다녔고, 이래저래 남는 시간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썼다.(게임도 참 많이 했다.) 길든 짧든 멀든 가깝든 돈을 쓰든 못쓰든 여행도 짬이 될 때마다 다녔다. 그러다 타지에서 우연히 취향의 문화적 방향을 공유하는(세부 영역은 완전히 다르지만) 부인을 만나 긴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이는 우리 부부가 다른 이들에게 부끄러이 내놓는 자랑 중 하나이다.

결혼 반년 전 처음 만났던 마을을 같이 여행했는데, 이 여행은 전반적으로 서로의 다름에 대해 절실히 인식했던 여행이기도 했다. 중간중간 엄청 싸웠단 뜻..


개개인의 인생관과 경험을 부정하는 파편적인 조롱은 현대 인터넷 문화가 불러온 재앙일지도 모르겠는데, 설거지론 역시 그러한 요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한 명의 인간이 살아온 시간은 타인이 퐁퐁남이랍시고 쉽게 피상화 시킬 수 있을 만큼 헛되이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논객이 설거지론을 대하고는 본인 이야기라 침묵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대하면 이러한 파편을 대하는 맹목성(뇌피셜)이 거의 유행이 된 거 아닌가 하는 참혹한 심정도 든다.


혹여나, 설거지론의 조건에 외적으로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위 정리의 1, 2에 부합하는 이들이 결혼하였고, (더불어 경제권도 없는) 남편이 설거지론을 접한다. 실제로도 사랑이 없는 결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설거지론을 접한 남편은 스스로를 퐁퐁남이라고 인식하며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그 인식을 바탕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과연 매트릭스를 깨는 붉은 알약인 것일까.


아니다. 결혼 관계라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특히나 육아가 끼어들면 카오스 그 자체가 되기 십상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2시간이면 깨서 젖 달라고 울고, 신생아와 하루 종일 붙어있는 부인의 관심사는 오롯이 아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게 마냥 좋아서 관심을 쏟는 것도 아니기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남편이 육아를 돕든 외면하든 이 이 시점이 서로의 본질에 직면하며 변화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가 없다고 해도 그러한 갈등의 순간은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나라가 개도국 시절의 남녀 관계였으면 그래도 남편이 (폭력을 동반하여) 부인을 억압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때도 아니겠다. 그런데, 그 혼돈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 속에서 남편을 착취한다는 부인에 대해 굳이 예전의 매력남과 연애하던 시절의 기억이 동력이라 가정해야 하는 게 맞을까. 개개의 상황에서 실제로 작용하고 있을 요인들만 수십 가지일 텐데 말이다.


만약 그 착취가 사실이라면, 남편은 본인이 사회적 현상의 희생양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본인 안목을 탓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만 기른다면 착취적인 사람과 만남을 가지며 결혼까지 갈 일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집단일 지라도 최소 한 명의 이상한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신의학 교과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2001-2002년 수행된 연구에서 미국 성인의 14.8%가 적어도 하나의 성격장애(인격장애,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착취에 대해서라면 이러한 성격장애 중 일부를 가진 상대를 만나 결혼하여 착취를 당하고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 단순화된 도식만 따지면 남 탓을 하고 있을 퐁퐁남이든 상대 부인이든 그 연애 대상이든 평범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사람으로 보이진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지뢰의 이미지에 걸맞은 건 이쪽일 수도 있다.

지금의 가상공간을 들여다본다. 언젠가부터 게시판 문화가 아닌 댓글 문화가 인터넷의 일상이 되었다. 깊은 사고를 담은 장문의 글은 지루함, 설명충의 낙인 속에 가라앉아 있고, 보고 읽는 이가 움찔할 만한 자극적인 스크린샷에 동반한 짧은 글들이 우리 앞에 인기글로서 펼쳐져 있다. 나이 든 이들은 내용물과는 상관없이 꼰대와 틀딱이라는 아래 세대의 낙인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이다. 지혜보다는 지능이 우선하는 시절이니 말이다. 어떤 이야기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맞는 근거들을 취사선택하여 논지를 강화하는 편이 훨씬 쉽기도 하다. 대부분의 커뮤니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옆집 사람들도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 판이니, 이러한 흐름도 당연하겠다.


하지만 믿는 이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옳거나 진실일 수는 없다. 이 가설이 설명할 수 있는 집단이 다수라고 한다면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내적 완결성을 무기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상황을 단순화시킨다. 이야기 자체의 문제인지, 믿고 전파하는 이들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설거지론이라는 가상의 이론은 좌절된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욕망을 끄집어내는 지극히도 이기적인 해설의 한 표본일 수밖에 없다. 어느 지점에서 고민해 볼 수야 있는 그럴듯한 이야기이지만, 결코 진실의 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마도 이 異論에 대한 필자의 결론이다.


엄한 소리 하며 조롱하거나 자괴감에 빠지느니 그냥 현생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몰두해 보자. 경제력이 된다는 게 조건 아니었나.


작가의 이전글 강릉에 집을 짓자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