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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Mar 29. 2021

스물여덟, 신입승무원

02. 분노 : 살기 위해 죽다

분노 :  자신의 욕구 실현이 저지당하거나 어떤 일을 강요당했을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 생기는 부정적인 정서 상태


나는 분노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 있다면 그게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재능중 하나일 것이다.

처음엔 이 분노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알 수없었다. 죽을 둥 살 둥 지켜온 장거리 연애를 이름 모를 여자들과 함께 처참히 부숴버린 남자 친구인지, 여태껏 남한테 해코지 한 번을 안 하고 살던 아빠를 배신한 동업자인지, 혹여나 내게 불똥이 튈까 말도 못 하고 매일 새벽 교회에서 울음을 토해냈을 엄마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밤낮이 뒤바뀌고도 현실 같지 않은 새벽을 몇 번 보내면서 정해진 타깃 없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억울함에 온 얼굴을 적시며 잠든 날이 많았다. 그리고 그 분노의 근원이 지구 반대편의 그 현실 같지 않은 곳으로 도피해버린 나 자신으로부터 왔다는 걸 알게 된 어느 날 새벽, 창문 넘어 뜨는 해를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일자리 면접을 나갔다. 돈을 모으기 위해 아침엔 출근을 하고 저녁엔 영어 과외를 하면서 밤낮으로 일했다. 대학생활로 익숙했던 서울로 올라가면 훨씬 수월했겠지만 당분간은 본가에 머무르면서 엄마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어느 날 저녁, 이제 막 저녁 밥상을 치운 엄마를 다시 식탁 앞에 앉혔다. 언제나 그랬듯, 한결같은 나의 패턴이었다. 계획하고, 또 계획하고, 선포하기.


“ 엄마, 나 승무원 해보려고 “

엄마의 눈빛이 걱정으로 가득 찼다.

“ 길어야 이번 겨울까지야. 그 안엔 될게. 꼭. “


어릴 때부터  난구석이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을   수록 하필 내가 가진 욕망들  가장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숙명처럼 여겼다. 독사처럼 조용하고 민첩해져서 기어코 그것을 손에 쥐었다. 확률이 없는 일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베팅에 주변에선 만류가 잦았지만 결국엔 해내고 마는 나를  신기해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깡다구가 남다르다며 놀라 했고 아빠는 그것이 본인을 닮아 있는 타고난 사업가 기질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선택에 대한 대가는 오롯이  몫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알고있는 아이의 몸부림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종종 나를 외롭게 했지만  쓸쓸함 조차 내가 처리해야  감정이었다. 오기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 나를 온전히 던져 얻는 희열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독기 가득한 몸무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살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가야만 했다.


우리 엄마는 알았을까.

이런 나를 낳고 평생 봐온 그녀는 그날 또다시 탁자에 앉아 바라보는 내 눈을 통해 읽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뭔가 일을 내겠구나 하는 걸. 또 다른 도전, 내 나이 28살이었다.




본가에 내려온 지 3개월, 한 외국 항공사에서 한국인 승무원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항공사에서는 최초의 한국인 채용인 데다 근 5년간 뚝 끊긴 중동 항공사의 단물 같은 채용소식에 30명의 자리를 두고 몇천 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에이전시와 협연을 맺은 국내 학원 선생님들과의 짧은 인터뷰를 통과하면 중동 에이전시에서 파견된 외국인 (영국인) 면접관들과 면접이 치러지는 형식이었다.

결국 일차로 걸러지는 건 한국사람들이 보는 기준으로 결정된 것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일까, 회사 자체에 소속된 외국인 인터뷰어가 아닌 한국 에이전시와 치러질 거라는 면접이 마음에 걸렸다.

호텔에서 일하던 시절, 주말이 되면 매니저 두 명을 끼고 펍에 놀러 가고 할아버지 뻘의 벨보이와 스스럼없이 농담을 즐겼던 나는 나 스스로가 외국인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는 타입임을 알고 있었다.


8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 1분간의 짧은 자기소개로 끝난 면접에서 몇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면접장을 걸어 나와야 했던 나는 고민 끝에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편도 티켓을 끊었다.

[ 인천발, 오후 5시 이코노미 성인 1명]


엄마에겐 며칠간 서울 친구 집에서 머물 거라고 말했다.

새벽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구글 맵을 켜 항공사 본사 위치를 검색했다. 아마 살면서 저지른 일중 손에 꼽히는 미친 짓이 아니었을까. 여권과 이력서 한 장을 손에 쥐고, 나를 태운 비행기는 이름도 생소한 그곳으로 이륙 중이었다.

 



한산한 공항엔 진한 아랍 향수가 코끝을 찌르고 눈앞엔 티브이에서만 보던 머리에 까만 두건을 두른 사람들이 가득했다. 입국을 위해선 비자가 반드시 필요한 나라였지만,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몇몇 소수 국적을 가진 국민에겐 방문 비자(Arrival visa)를 허용하고 있었고 다행히 우리나라도 리스트에 포함되어 입국심사대를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비자를 발급받는 동안 SNS를 통해 둘러본 이 사막 나라엔 예쁜 바닷가를 따라 긴 산책로가 나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예뻐서 괜스레 신이 났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택시기사 때문에 예약한 호텔 웹사이트에 나온 주소를 아랍어로 번역해 보여주고 뒷좌석에 앉았다. 온갖 아랍어가 적힌 간판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색적인 모습으로 가득한 창문 넘어의 풍경에 혼이 빼앗겨 도착한 호텔 로비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입실을 위해 제출한 여권으로 확인된 첫 한국인 투숙객에 흥분한 지배인이 사진 찍기를 요청했지만 정중히 거절한 뒤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은 침대 하나, 조그마한 화장대 하나가 전부로 허름했지만 쏟아지는 피로에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고요한 방에 나 혼자였다. 창밖으로 간간히 사람들의 말소리와 차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뭐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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