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탐욕 : 올인
탐욕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
중동은 우리나라와 달리 금요일, 토요일을 주말로 지낸다. 생각해보니 동양에서 온 어린 여자가 주말 다음날부터 귀찮게 하는 상황이 그들에게도 별로 달갑지 않을 것 같아 하루를 더 지내고 월요일에 방문하기로 다짐했다. 내가 머물러 있는 동안 이곳은 일 년에 한 달 동안 이어지는 라마단 기간 (* 이슬람교에서 행하는 약 한 달가량의 금식기간으로, 해가 떠 있는 낮 시간에는 음식과 물을 먹지 않는다)이었기 때문에 오후 6시 이전엔 그 어떤 상점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오전에는 방에 있다가 해가 진 이후에 호텔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내일 먹을 음식을 사 와 버티며 인터뷰 준비를 했다.
대망의 월요일 아침, 거울 앞에 앉아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묶었다. 조금의 주름도 허용하지 않은 말끔한 정장과 광나는 구두도 신었다. 로비에 내려오자마자부터 마주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난생처음 보는 한국 여자에게 집중됐다. 호텔 앞의 비포장 도로를 따라 쭉 걷다가 겨우 잡은 택시에 몸을 싣고 노파심에 구글맵도 켰다.
(이곳의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방글라데시, 이집트, 인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어서 영어가 서툴다.)
도착한 본사는 경비가 나름 삼엄해서 들어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내부 또한 규모가 크고 복잡해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 제대로 된 담당자를 만날 수 있는지 감조차 오질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동양 여자의 방황이 온 회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잘 될 일도 그르치겠다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길을 가던 직원 한 명을 덥석 붙잡았다.
"승무원 면접을 보러 왔는데 HR 부서가 어디인 줄 아니?”
“HR 부서는 이 건물이 아닌데”
시간이 촉박해서 당황하며 지체할 여유 조차 없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담당자 이름이 적힌 쪽지를 들고 허무하게 다시 택시를 잡으려는데 초소를 지키던 경비가 내게 다시 말을 건다.
"여기는 택시가 안 잡히는 곳이야"
갈수록 태산이었다.
라마단 기간엔 2시에 오피스 문을 닫기 때문에 다가오는 점심시간 이전에는 반드시 담당자를 만나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었다.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는 사이, 사원증을 목에 매고 있는 한 남자가 개인 승용차를 타고 내 옆을 지나간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다.
"정말 미안한데, 혹시 HR이 있는 건물로 가는 중이면 나 좀 태워다 줄 수 있을까?"
생에 첫 히치하이킹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경비가 더 삼엄한 편이었다. 약속 없이 온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경비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저지당했고, 우여곡절 끝에 내 여권을 맡기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담당자 만나러 온 거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랍 사람처럼 보이는 여 직원이 서있다.
"응. 근데 내가 약속을 하고 온 게 아니라서.."
"알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지금은 담당자가 자리에 없는데,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기다릴게. "
일단 맞게 온 것 같으니, 한시름 놓고 소파에 앉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인 그녀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했다. 상냥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에 잠긴 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누군가 자신의 오피스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 네가 나를 오래 기다렸다고 하더라, 어쩐 일이야? "
" 내가 말도 없이 이렇게 너를 찾아와서 참 당황했을 텐데 만나줘서 고마워. 사실 내가.. 너희 회사에서 캐빈크루로 일하고 싶거든. 혹시 이력서를 받아줄 수 있나 해서 왔어."
" 그래? 일단 이력서를 좀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준비해 온 것 좀 볼 수 있어?"
"응!"
패기 있게 저질렀으나, 본사를 통한 채용계획은 없다며 단박에 문전박대당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인지 내 이력서를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참을 내 이력서를 살펴보던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물었다.
" 너 이 곳에 살던 로컬이 아니야? "
" 응, 그제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도착했어. "
" 뭐?, 어떻게? 스폰서 없이? "
" 한국인도 방문 비자 발급이 가능하거든. 그래서 스폰서 없이 올 수 있었어."
" 정말? 왜 한국에서 도전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어?”
놀라움에서 호기심으로 바뀐 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그럴 만도 하지. 여권 하나 달랑 들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을 인터뷰 하나에 13시간이 걸리는 길을 건너왔으니.
오피스에 앉아 한참을 그녀와 이야기했던 것 같다.
해 줄 이야기가 많아 오히려 신이 났다. 인터뷰마다 입에 경련이 날 정도로 웃고 있어야 했던 기존의 압박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진짜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얼마나 이 일에 욕심내고 있는지도.
" 흥미롭다. 일단 나는 너를 며칠 뒤에 동료들이랑 다시 보고 싶은데, 혹시 로컬 번호 있으면 알려줄 수 있어?"
" 당연하지."
공항에서 구입했던 유심칩에 적힌 번호를 메모지에 적으며 오타는 없는지 몇 번을 확인한 뒤에 오피스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내내, 왠지 모르게 스며드는 확신으로 온몸이 뻐근해졌다.
‘아, 나는 이 곳에서 오래 살게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