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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 Aug 22. 2023

나는 지지 않아

영화 '그녀의 취미생활'

여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가 있다. 바로 ‘스릴러’이다. 필자는 스릴러를 그렇게 즐기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무더운 여름이 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스릴러 영화로 눈을 돌리게 된다. 오는 8월 30일, 한국 스릴러 영화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을 영화 <그녀의 취미생활>이 개봉한다. 


하명미 감독의 첫 장편 영화인 <그녀의 취미생활>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귀재 서미애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시골 마을에서 자란 ‘정인’과 도시에서 이사 온 ‘혜정’의 이야기를 그린 킬링 워맨스릴러 <그녀의 취미생활>은 올해 제27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배우 정이서가 배우상을 수상하고, NH농협 배급지원상까지 2관왕을 차지하며 이미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혜정’ 역을 맡은 배우 김혜나는 영화 <꽃섬>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넘나드는 매력을 보여주었고, ‘정인’ 역을 맡은 배우 정이서는 <기생충>에서 피자집 사장으로 열연하며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두 사람의 열연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폐쇄적인 시골인 박하마을에서 자란 정인은 누구보다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마을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정인의 앞에 도시에서 이사 온 혜정이 나타난다. 세련된 자동차와 함께 나타난 혜정의 거침없는 모습은 정인의 눈길을 사로잡고, 혜정 역시 정인에게 관심을 보인다. 


다재다능한 혜정은 정인에게 바이올린, 꽃꽂이, 밤낚시 등 새로운 취미를 가르쳐주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정인의 얼굴엔 웃음이 번지게 된다. 한편, 정인의 전남편이 등장하면서 조용하지만 어딘가 서늘하고 싸한 박하마을에 이상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한다. 


비밀에 둘러싸인 혜정과 연약해 보이지만 가슴 속에는 그 무엇보다 강렬한 불꽃을 가진 정인. 두 사람이 펼치는 아슬아슬한 핏빛 복수극이 지금 시작된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한 마디로 잘 만든 영화이다. 마치 다른 각도에서 볼 때마다 다른 색감이 나타나는 프리즘처럼 다양한 매력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킬링 스릴러라는 장르에 걸맞은 예리한 서스펜스, 혜정과 정인이 선사하는 섬세한 여성 서사, 아름다운 미쟝센이 자아내는 평화로움과 서늘함,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내는 묘한 긴장감까지, 이 영화에는 다채로운 매력이 한껏 담겨 있다. 


이처럼 다양한 매력을 가진 영화 <그녀의 취미생활>을 보다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감상 포인트를 세 가지 준비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으니 안심하고 이 글을 정독한 후, 영화를 통해 혜정과 정인의 이야기를 직접 만나보길 바란다.   



서술 방식이 주는 신선함 



여성 서사 스릴러와 복수극은 장르 그 자체로 신선함을 준다. 그런데 <그녀의 취미생활>은 그 외에도 스릴러 영화로서 차별화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서술 방식이다. 


은유와 함축은 스릴러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서술 방식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사건을 예측하게 하고, 그 예측을 뒤집거나 충족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주는 것이 보통의 흐름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취미생활>도 은유와 함축을 활용한 서술 방식으로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스릴러 영화에서 은유와 함축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바로 사건의 진행 장면이다. 대부분의 스릴러 영화에서는 어떤 종류의 사건이든 그 진행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한다. 비명, 유혈, 초자연적인 현상 등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연출된 사건은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공포감을 선사하므로 스릴러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취미생활>에서는 직접적인 사건의 묘사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묘한 분위기만 지속될 뿐, 그 무언가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칼은 나와도 무언가가 썰리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람의 피부 같은 것 말이다. 곧 눈앞에 나타날 유혈 사태를 예견하며 심장을 부여잡아도 스크린에 보이는 건 저수지 수면을 비춘 아름다운 달 뿐이다. 갑자기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하는 장치도 전혀 없다. 오로지 사건에 대한 함축적인 묘사만 존재한다.


사건의 묘사뿐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설정 역시 은유와 함축으로 전개된다. 정인의 과거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첫 장면만으로 관객들은 정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혜정 역시 마찬가지다. 혜정의 과거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 그저 비밀이 함축된 대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은유와 함축을 적절히 활용한 서술 방식은 스릴러 영화의 특징인 서스펜스를 효과적으로 살려준다. 


관객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 있는 사건을 기다리면서 공포감을 느끼고, 명확히 보여주지 않은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된다. 또한, 크게 잔인한 장면 없이 복수극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간 자체에 대한 공포감과 회의감, 환멸 같은 감정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어서 신선했다.   



의도된 연출을 찾아내는 재미 



앞서 말했듯이 <그녀의 취미생활>은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연출이 특히 돋보이는 영화였다. 그렇지만 부족한 설명으로 관객들의 이해를 방해하는 불친절한 영화는 전혀 아니었다.


시사회에 이어 참여한 GV에서 만난 하명미 감독은 관객들과 영화에 대해 소통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감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취미생활>에 하명미 감독이 심어둔 장치들은 대부분 찾아내기 쉬운 편이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감독이 의도한 바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스스로 영화의 조각을 맞춰나가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나의 예시로, <그녀의 취미생활>에서는 대비를 강조한 연출이 상당히 흥미롭게 드러난다. 이 대비는 영화에서 정말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일단 두 주인공의 모습부터 정반대이다.


시골에서 자란 정인은 언제나 조용하고 어딘가 모르게 소심하며, 겁에 질린 듯 위축된 눈빛은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자꾸만 혜정에게 관심이 가지만, 나무 뒤에 숨어 엿보기만 할 뿐 섣불리 용기를 내지 못한다. 숲속의 연약한 토끼를 연상시키는 하얀 피부와 수수한 옷차림은 정인의 유약함을 강조하는 것만 같다. 


반면 멋진 차와 함께 도시에서 이사 온 혜정은 첫 등장부터 강렬하다. 언제나 거침없고 당당하며,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단단한 눈빛을 한 혜정은 정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영민하고 용감한 재규어를 연상시키는 까만 피부와 자유로운 옷차림은 혜정의 강인함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뿐 아니다. 두 사람이 거주하는 집의 위치 특성상, 위쪽에 사는 혜정은 정인을 내려다보며 인사를 하고, 아래쪽에 사는 정인은 혜정을 올려다보며 인사를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것 외에도 혜정과 정인을 둘러싼 많은 설정이 서로 대비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대비는 전반적인 영화의 이미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화의 미쟝셴이 주는 시각적 아름다움은 기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나 흉흉한 마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두 사람이 함께 소풍을 가는 풀밭이나 함께 취미를 배우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심지어 공포감이 극도에 달하는 장면인 혜정과 재순의 재회 장면에 등장한 보름달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혜정과 정인이 입고 있는 하얀 옷도 대비를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 카타르시스를 보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붉은 피와 무거운 총, 파열음과 대비되는 흰 옷은 두 사람의 순수성과 과거를 나타낸다. 그러니 새하얀 옷은 그와 반대되는 어둡고 무거운 현실을 스스로 이겨나가는 두 사람의 어떤 의식과도 같은 셈이다.


이러한 대비적인 연출은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정인의 꿈 역시 중요한 장치로 만든다. 무서운 내용과 달리 아련한 느낌으로 연출된 정인의 꿈은 그 대비되는 이미지를 통해 현실 속 복수를 더욱 슬프게 만들어 준다. 


아름다움을 강조한 연출은 영화가 담고 있는 혜정과 정인의 서글픈 서사를 극대화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대비되는 아름다움이 그들이 이겨내야만 하는 역경의 서글픔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명미 감독은 여러 연출을 통해 영화 곳곳에 메시지를 심어두었고,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그 연출을 찾아낼 수 있다. 이 과정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이해도를 높여주고, 그 자체로 감독과 관객의 소통이 된다.   



캐릭터의 입체성과 그들의 관계성 



<그녀의 취미생활>의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캐릭터의 관계성이다. 스릴러 영화라고 해서 마냥 스릴러나 서스펜스에만 치중하지 않은 이 영화는 혜정과 정인이라는 캐릭터를 매우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똑똑하게 그려낸 두 여성이 이끌어가는 <그녀의 취미생활>은 여성 서사의 부드러움과 복수극의 강인함을 함께 담아내 그 매력이 배가 된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영화의 흐름은 정인과 혜정이 걸어온 인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걸 짐작하게 해준다. 정인은 억눌려 살아온 삶 속에서 마음속에 불꽃을 피우게 되었고, 그 과정을 겪으며 단단해진 혜정은 본능적으로 정인에게 이끌리게 된다. 


혜정은 정말 신비한 캐릭터이다. 당찬 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혜정을 더욱 오묘하게 만든다. 높은 이층집에서 마을을 굽어보며 폐쇄적인 마을을 휘저어 소용돌이를 만드는 혜정의 눈빛은 견고해 보이기만 하다.


그렇지만 가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릴 때가 있다. 금세 중심을 잡고야 마는 혜정이지만 찰나의 흔들림은 그녀의 강인함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상하게 만든다. 두려울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혜정은 이겨낼 뿐이다. 죽지 말라는 정인의 말에 나는 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처럼, 혜정은 어쩌다 보니 주어진 역경과 시련을 이겨낼 뿐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런 혜정을 만난 후, 정인도 성장한다. 정인이 성장하면서 보여주는 캐릭터의 입체성은 영화가 주는 중요한 감동 중 하나이다. 정인의 할머니는 품에 안겨 오는 손녀에게 정 참기 힘들면 아무도 안 볼 때 확 꼬집어 버리라는 말을 해준다. 목적어가 없는 그 말은 나에게도 참 아프게 와 닿았으니, 정인에게는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정인은 뭐든지 거침없이 해내는 혜정에게 언니는 뭐든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그때 혜정은 정인에게 너도 그럴 것이라며 웃으며 대답해 주고, 정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나중에 혜정이 정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잖아, 라고 했을 때 정인이 보여줬던 오묘한 표정은 처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정인은 분명 성장했다. 가슴 속에 작은 씨앗을 심은 것은 할머니도, 혜정도 아닌 정인 스스로다. 그걸 키워 끝내 복수의 꽃으로 틔워낸 것 역시 그 누구도 아닌 정인이다. 혜정은 그저 옆에서 정인의 손을 잡아주었을 뿐이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정인의 눈빛을 따라 정인의 선택과 정인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한편으로는 아주 긴장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후련한 일이다. 정인은 아직 행복을 찾는 과정 속에 있다. 그저 정인이 스스로 일상 속 세잎클로버를 찾아내길 바랄 뿐이다.


처음에는 작게 손을 흔들며 서로의 안부를 묻던 두 사람이 점점 더 많은 순간을 함께 하게 되고, 결국엔 손을 맞잡는다. 배우들의 연기와 제작진의 연출은 이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더욱 혜정과 정인의 성격이나 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처음엔 머뭇거리며 혜정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던 정인이 혜정과 마주 앉아 자수를 두는 모습이나, 존댓말을 사용하던 혜정이 정인에게 반말을 하는 모습 등 두 사람의 관계성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두드린다. 


혜정과 정인 두 사람의 만남, 두 사람의 성장, 그리고 두 사람이 쌓은 유대감은 마치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케 한다. 어쩌다 보니 살인에 휘말리게 된 델마와 루이스처럼, 어쩌다 보니 함께 총을 들게 된 혜정과 정인이 앞으로 어떤 걸음을 함께하게 될지 정말 궁금해진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하명미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작품성과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작품이다. 


적절한 연출이 흥미로운 스토리를 뒷받침해 주면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스릴러의 묘미와 드라마의 감동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작진과 배우 모두가 애정을 가지고 만든 영화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또한, 영화가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워서 원작 소설에 대한 흥미도 생겼다. 


무엇보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렇게 대사가 많지 않은 캐릭터인 정인을 연기한 배우 정이서는 눈빛과 몸짓만으로 모든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망설임, 두려움, 상처, 결의 등 다양한 정인의 감정이 정이서 배우의 눈빛과 손끝에 담겨 있다. 정이서가 보여주는 정인은 작고 왜소하지만 그만큼 단단하게 뭉쳐 있어 무게감이 있다. 순수함과 강인함이 공존하는 정이서의 마스크가 서사를 채워주면서 영화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했다. 


김혜나 배우의 연기는 그야말로 혜정 그 자체였다. 도시에서 온 것 같은 강인한 여자를 완벽하게 연기해 낸 배우 김혜나는 여유로운 미소로 관객을 홀린다. 시원시원한 외관과 똑 부러지는 말투는 정인을 이끌어 주었듯 관객들도 영화 속으로 이끈다. 시원한 미소로 정인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혜정의 성숙한 모습을 표현하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면의 슬픔과 두려움을 함께 표현해낸 김혜나 배우의 노련한 연기는 서사를 완성하면서 영화에 무게감을 더해준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영화이다. 억눌린 채 볕을 그리는 여성과 그 모든 순간을 견딘 후 단단히 뿌리 내린 여성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어주는 그런 영화이다. 혜정이 정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듯이, 정인이 혜정의 손을 맞잡았듯이 우리도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복수의 꽃을 피우는 킬링 워맨스릴러 <그녀의 취미생활>은 오는 8월 30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연기, 연출, 스토리 그 무엇도 빠지지 않는 이 작품을 2023 여름의 마지막 스릴러 영화로 선택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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