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Oh, Life
계절이 바뀌면 듣는 노래도 달라진다. 계절마다 풍기는 분위기도 다르고, 어울리는 노래도 다르기 때문이다. 또, 어떤 계절에 처음 듣기 시작한 노래는 어느새 그 계절을 품게 된다. 그래서 필자 역시 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플레이리스트를 재정비하는 편이다.
지금도 새로운 계절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곧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면서 [2023 겨울]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갈 곡을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있다. 만약 필자처럼 올해 겨울을 보낼 플레이리스트를 재정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플레이리스트에 새롭게 추가할 만한 앨범을 추천하고자 한다.
바로 싱어송라이터 마치 (MRCH)의 새로운 앨범, [Oh, Life] 앨범이다.
싱어송라이터 마치는 2019년 8월 데뷔했으며, 연세대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데뷔 전에는 연고티비의 ‘조이’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고, 후에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마치는 현재 3개의 미니 앨범과 6개의 싱글 앨범을 발표했으며, 싱어송라이터답게 앨범 전곡 작사 작곡을 맡아 실력을 증명했다. 또한, 마치는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앨범 활동 외에도 마치는 걸그룹 woo!ah!의 ‘별 따러 가자’와 ‘Rollercoaster’를 작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TWICE의 곡 ‘Celebrate’, 'GOT THE THRILLS', 그리고 ‘Talk That Talk’를 작곡하면서 대중들에게 마치만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이번 10월 18일 마치는 3번째 미니 앨범 [Oh, Life]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더블 타이틀곡인 ‘Lovers’와 ‘항복’을 비롯하여 총 5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전곡 마치가 작곡하고 작사하였다.
[Oh, Life]는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기쁜 날, 답답한 날, 속상한 날 중에서도 유독 발걸음이 느려지는 날들을 녹여낸 앨범이다.
마치는 [Oh, Life]를 소개하면서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닐 거라고 말했다. 또, 마치는 힘듦은 나눌수록 크기가 작아지므로, 본인의 숨통이 트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번 앨범을 발매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듣는 이들의 힘듦 역시 마치가 나눠 들어주겠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 힘듦을 나누면 반이 된다. 소박한 하루를 살아내면서 겪었던 수많은 무력함이 이 앨범과 함께 반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과 사랑 사이
텅 빈 맘 채울 길이 없네
눈을 감아봐도 뒤를 돌아도 그 아무도 나에게로
무궁화 꽃이 피었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작되는 ‘무궁화 꽃이 피었나’는 알 듯 말 듯 한 인간관계를 무궁화 꽃 게임에 비유한 노래이다.
이 게임은 술래가 눈을 가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외치는 동안 플레이어들이 슬금슬금 술래에게 다가오는 게임이다. 술래가 뒤를 돌아봤을 때 움직인 플레이어는 술래에게 잡히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술래에게 들키지 않고 그를 구해내야 한다.
이 게임처럼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내게로 다가오지 않는 것만 같은 공허한 순간들이 있다. 분명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를 바라볼 때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순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에 대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순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어렵다.
이상하게도 사람들 사이에서 공허함을 느낄 때마다 더욱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게 되는 건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여럿이서 꼭 붙어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 더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도망치고 있는 거다.
‘무궁화 꽃이 피었나’는 이러한 인간관계 속 쓸쓸함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드럼의 멜로디와 조곤조곤한 화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차분하게 가라앉은 스스로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조금은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에 내려앉는 걸 느끼며 한없이 걷고 싶은 날 함께하기 참 좋은 곡이다.
하지만 사실 무궁화 꽃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조금씩 술래에게 다가오는 게임이다. 언젠가는 설렘을 안고 뒤를 돌아봤을 때, 내게 다가오는 이들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이 공허함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본다.
오랜만이야 어색한 이 한 줄기 햇살
어려운 거야 가지 말고 날 비춰 줘요
몽환적인 마치의 보컬이 돋보이는 ‘Sunlight’는 자꾸만 도망가는 햇빛을 갈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날 비춰주지 않으면 구름의 편에 서버리겠다는 귀여운 협박 속에는 사실 뜨거운 햇빛을 향한 간절한 바람이 가득 담겨있다.
매일 매일 우리는 크고 작은 비참함과 마주한다. 타인과의 비교에서부터 오는 비참함 말이다. SNS에는 다들 좋은 모습만 보여준다는 걸 알면서도, 슬금슬금 피어나는 부러움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다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것만 같은데 나 혼자 이 서늘한 그늘에 서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온기를 곱씹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겐 익숙해 보이는 이 한 줄기 햇살이 내게는 한없이 어렵고 어색하게만 느껴질 때 더욱 그 빛을 갈구하게 된다. 따스한 햇살이 차갑기만 한 내 손을 녹여주기를 바라면서 손을 뻗게 된다.
‘Sunlight’는 세련된 일렉트릭 기타의 멜로디 라인이 마치 특유의 보컬과 어우러져 따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속에 담긴 가사가 차갑게 마음에 내려앉으며 이 곡의 매력이 극대화된다. 그래서 ‘Sunlight’는 공기는 차갑지만 햇살만은 따뜻한 겨울의 낮에 잘 어울린다. 지상을 내리쬐는 이 햇살이 내게도 공평하길 바라며 듣는다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굳세게 너에게 맞출 내 맘 조각인거지
내가 아쉬운 모양인거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억울한 마음에 항변해 보고 싶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조용히 억울한 마음을 접어 억누르게 된다. 아쉬운 사람이 맞추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못내 한숨이 나오곤 한다. ‘아쉬운 모양’은 바로 이런 마음을 담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날카롭게 나를 대한다고 해도 내가 더 좋아하기 때문에 맞추는 건 결국 내 몫이다.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내 모습과 마음을 갈아서 상대에게 맞추다 보면 그 속에서 마모되는 건 결국 내 감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쪽이 맞춰야지, 뭐.
‘아쉬운 모양’은 담담하게 그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베인 손가락에서는 피가 흐르고, 깊숙하게 찔린 마음엔 흉터가 생겨도 굳세게 네 마음에 맞추겠다며 담담하게 노래한다. 그 보컬을 단단하게 뒷받침하는 베이스의 소리는 굳건한 화자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 같다.
‘아쉬운 모양’은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끼워 맞춰본 마음이 회의감에 젖을 때 딱 듣기 좋다. 따뜻하게 데워진 침대 속에서 상처 입은 마음을 토닥여 주고 싶을 때 제격이다. 나만의 공간에서 오롯한 나만의 감정을 느끼면서 흥얼거리기 좋은 곡이다.
그렇지만 잠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깨닫기를 바란다. 아쉬운 모양을 계속해서 맞춰나가다가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을 기워야 하는 것 역시 내 마음의 몫이라는 걸. 상대를 맞춰주기만 하면 결국 길을 잃는 것도 내 마음이라는 걸.
Oh we all used to be givers
사랑을 건넸고 세상을 받았지
그리워 사랑할 수 있던 그 우리가
[Oh, Life]의 타이틀곡 ‘Lovers’는 필자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Lovers’는 각박한 세상과 삶에 치여 이제는 사랑하는 방법까지 잊어버린 우리들에게 우리도 과거엔 사랑을 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생각해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아니,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차갑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투명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했고,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에게 주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확실히 지금은 내 스스로를 돌보는 것도 바빠서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는 부족해진 것 같다.
마치는 이 곡을 소개하며 사랑하는 방법을 잊지 말자고 했다. 사랑하는 방법이 뭐더라? 내 바다의 푸르름도, 내 심장의 붉은 빛도 전부 쥐여주고 싶은 마음? 그것도 아니면 숨 하나도 아깝지 않던 그런 마음?
그럼 왜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됐을까. 건네준 마음이 동일한 크기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됐을 때부터일까. 분명 내 모든 걸 줄 수 있었는데, 돌아보니 이젠 건네줄 무언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투명한 마음은 점점 빛이 바래졌다.
그때도 이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그저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고, 바보 같았고, 사랑을 몰랐을 뿐이다. 참 애석한 일이다. 사랑에 대해 모를수록 사랑에 거리낌이 없어지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는 그 시절이, 그때의 우리가 그립다고 말한다. 그것 역시 돌이켜보면 우리의 한 여름 중 한 조각이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도 잊지 말자. 우리는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자. 선뜻 무언가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자. 우리에게서부터 사랑이 피어난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Lovers’는 아주 추운 겨울의 아침과 잘 어울린다. 너무 추워서 모든 기력이 떨어져 버렸지만 어쩔 수 없이 기운을 내야만 하는 아침.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하는 여름의 푸르름이 그리워지는 아침. 이 곡은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가 어우러지는 반주에 드럼이 등장하면서 뿜어내는 시너지가 상당한 곡으로, 호소력 짙은 마치의 목소리가 추위에 어쩔 수 없이 움츠러드는 아침을 보다 힘차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사방이 적 그들은 지금 스텔스 모드
난 매일 생각해 무적의 나이면 좋았을 텐데
이 휘날리는 백기 하나 누가 뭐라 할까
하루 끝에서 폭풍처럼 몰려드는 고단함을 느끼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하루 종일 수많은 적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Oh, Life]의 또 다른 타이틀곡 ‘항복’은 우리가 매일 매일 벌이는 사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 오늘 하루를 곱씹어 보자. 무엇과 그렇게 힘든 결투를 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아침부터 날 깨우는 모닝콜. 고단한 일을 마치고 찾아온 디저트의 유혹. 자야 하는 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스마트폰. 절대 흔들리고 싶지 않지만 결국 후들후들 매달리게 되는 그 사람의 연락. 우리를 둘러싼 사방이 적이다.
그저 평화와 약간의 즐거움을 바랐을 뿐인데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유혹들이 너무나도 많다.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백기를 들고야 마는 내가 나약하게만 느껴져서 스스로가 무적이길 바라는 마음은 결국 무력한 마음으로 귀결되면서 더욱 슬퍼진다.
결국 포기를 외치며 항복하는 순간, 우리는 마음속 평안을 느낀다. 결국 마치가 이 노래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단 하나다. 당신은 사투에서 진 것이 아니라, 그저 안식을 얻었을 뿐이라는 것. 우리는 무적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백기를 들든, 항복을 하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누구의 명령도 아닌 그저 스스로에 의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고단했던 하루를 무사히 끝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최선을 다한 것이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복’을 들어보자. 그저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자신이 하얀색 깃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면, 꼭 안아주는 것도 좋겠다. 추운 귀갓길과 어울리는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의 멜로디 라인과 따뜻한 마치의 목소리가 당신을 위로해 줄 것이다.
딱 한 달 전, 현대카드 UNDERSTAGE에서 열렸던 마치 EP 발매 기념 콘서트 [Oh, Life]에 다녀왔다. 공연장에서 만난 마치는 빛이 났다. 노래하는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관객을 바라보는 표정에서는 행복함이 가득 묻어났다. 밝은 조명이 잘 어울리는 그를 보면서 필자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선 빛이 난다는 걸 다시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던 마치 역시 무대를 내려가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각종 부정적인 감정에 잠길 때가 많다고 했다. 그가 직접 느꼈던 감정을 담았기 때문에 마치의 앨범 [Oh, Life]가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느꼈다.
독특한 음색과 시원한 가창력과 함께 마치는 리스너들을 자신만의 특색이 돋보이는 음악 세계로 초대한다. 필자는 지금 그 세계로 향하는 초대장을 건넸다. 마치의 음악이 새로 바뀐 여러분들의 계절을 포근히 감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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