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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Dec 09. 2023

공존하는 방법


“저 장바구니 좋아 보여서 일부러 빼놓은 건데 버렸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래서 언니 물어보고 버리려고 쓰레기봉투 문 밖에 안 내놓은 거잖아.“


“아니, 하지 말라 그랬는데 왜 정리를 해? 내가 다 나름대로 분류해 놓은 거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한국에서 가지고 온 거 독일에서 가지고 온 거 다 쏟아지고 섞여서 나뒹굴고 있었어.”


“아니라고, 다 지정된 공간에 있었다고! 내가 부엌에 갈 거랑 고양이 물품만 꺼내라고 했잖아! 내가 정리하겠다고! 건드리지 말라고!”


“언제 할 건데? 배달음식 쓰레기랑 곰팡이 잔뜩 핀 반찬통이랑 다 그냥 놔둬? 내가 온다고 했을 때 언니도 각오를 했을 거 아냐. 언니 혼자 살아? 나도 이제 이 집에서 사는 거라고. 나도 언젠가 짐을 풀어야 될 거 아냐?! 계속 이렇게 지내라는 거야?”


“Now everything‘s mixed up! 영수증 같은 것도 다 버렸을 거 아냐. 나 그거 다 필요하다고! 네가 뭐가 쓰레기인지 어떻게 알아?! 다 자리가 있다고...”


“그냥 바닥에서 다 주워서 엽서는 엽서랑 종이는 종이랑 화장품은 화장품이랑 정리만 했다고! 나는 이제 짐 풀고 저 방에서 자고 싶다고!”


악이 받힌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언니 집에 도착한 지 5일째, 첫 말다툼이다. 튀르키예로 입국한 첫날 하루종일 집 청소를 했고, 다음 날 아침 자몽 하나를 수저로 파먹었다. 언니가 독일에서 사 온 루이보스 캐러멜 차를 마시면서 감격의 박수를 쳤다.


언니는 몇 주 전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러 독일에 다녀왔다. 사다 줄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언니의 카톡에 Müller, Teekanne, Meßmer 사이트를 한 시간 가까이 뒤졌더랬다. 깜깜한 새벽, 얼굴로 빛 한줄기 쏘아 올리는 노트북으로 번역기를 돌려가며 익숙한 상품들을 찾았다. ‘와, 이 과자 좋아했었는데,’ ’ 겨울마다 이 차를 마셨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즐겨 마시던 차와 좋아하는 간식 리스트를 작성했다. 언니는 일요일에 마트가 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 치고는 바쁜 일정 와중에 원하던 차 10종류 중 8박스나 구해다 주었으니, 손수 제품 스크린샷까지 보낸 보람이 있다.


독일에서는 고작 4년 살았는데, 두고두고 생각나는 음식들이 생겼다. 연말이 다가올 때쯤, 조용히 불러내 올해 첫 크리스마스 시즌 티백을 사 왔다고 꺼내 보이던기숙사 스태프의 뿌듯한 미소가 아른거린다. 누구보다 좋아할 내 모습을 기대하며 특별한 차 종류나 과일을 사 오던,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설레며 손짓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빨래를 돌리고, 냉장고 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언니가 선생님으로 있는 학교를 한번 구경 갔다 오니 시간이 빠르게 지났고, 이제는 마지막 미션처럼 남겨둔, 굳게 닫혀 있던 침실의 문을 건드릴 때가 온 것이었다. 몇 개월 전 한국에 다녀온 언니의 짐은 미처 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닥을 한 구석씩 차지하고 있었다. 몇 주 전 독일에도 다녀온 캐리어는 의무를 다하고 창고로 들어가지 못한 채, 몇가지 물건만 뱉어내고 방바닥에 반쯤 열려 있었다. 덤으로 바빠서 미처 손대지 못한 배달음식 찌꺼기와 학교에 무언가 싸갔던 흔적을 남긴 반찬통, 침대인지 옷장인지 빨래통인지 알 수 없이 쌓여있는 옷과 옷가지 몇 개만 튀어나와 흘러내리고 있는 내 이민가방까지 방 중간에 떡하니 서있으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니는 아침마다 방에 조용히 들어가 옷을 찾고, 화장을 하고, 다소곳이 다시 문을 닫고 나오는 루틴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른 일은 다 했으니 당연히 이젠 방을 청소할 차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부얶으로 가야 할 물건과 고양이 물품만 꺼내고 나머지는 건드리지 말라는 언니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아니, 제대로 들었는데 언니가 직접 치울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릴 순 없으니 이 정도 치우는 건 괜찮을 거야, 의무감에 불타올라 넘겨짚었다. 난 옳고 바른 일을 하고 있으니 언니는 기분이 나쁘더라도 참아야지. 도와준다는데.


언젠가 처리해야 할 일을 하나 놔둔 채, 체크리스트 마지막 항목을 비워두자니 내 얕은 인내심은 무려 5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바닥이 났고, 끝내 언니가 그어놓은 선을 넘었다. 뿌듯한 마음은 반나절도 채 가지 앉았고, 언니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질문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짜증으로 물들여졌다.


싸운 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등을 돌리고 말없이 잠에 들었다. 언니는 소파에서, 나는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매트리스에서. 다음날 언니는 출근을 했고, 나는 방에 들어가 허리까지 오는 쓰레기봉투 두 개를 다 뒤집어 쏟아냈다. 영수증 하나, 포스트잇 하나, 빈 돈봉투 하나까지 쓰레기 속에서 골라내 책상에 고이 모셔두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며 시간을 뒤 감듯 화장대에, 서랍에, 부얶에 두었던 물건들을 다시 들고 와 종이백에 포장지를 넣고, 카드를 넣고, 물건도 넣어 조립했다. 반은 오기로, 반은 언니만의 공간과 질서를 나 정도면 무너뜨려도 될 것이라 자만했던 미안함으로 방을 다시 정리했다. 조합이 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언니도 기억을 못 하길 바라본다.


언니도 나도 무언가를 버리는 데는 썩 재능이 없다. 언니 방에는 영수증만 가득 찬 서랍이 있을 정도다. 아니, 버리기만 못하면 감지덕지, 누가 버리는 걸 주워오기도 참 잘한다. 아무래도 대대로 물려받은, 거부할 수 없는 습관이겠다. 다 쓴 마스크 줄을 잘라내 고무줄로 쓰시는 할머니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사 두 개를 부탁하면 책장에 있던 통에서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나사를 300개 가까이 쏱아내시는 할아버지를 닮았을지도. 골동품가게인지 사무실인지 알 수 없도록 온갖 고장 난 전자기기 비품을 모아두는 아빠와 빈 요거트 통을 화분으로 재활용하는 엄마에게 배웠으리라. 같은 공간을 쓰던 다른 사람들보다 난방비가 적게 나왔다는 말을 곱씹으며 하루종일 뿌듯해하는 엄마를, 유통기한 지난 음식도 일단 맛은 보고야 마는 아빠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거라 믿기 때문인 것도, 아껴 쓰고 절약하자는 취지인 것도 있지만, 언니와 나는 추억 보관용이라는 핑계를 더 자주 대기도 한다. 냄새나 음악에 기억이 담기듯이 작은 영수증이라도 소중히 대하는 순간 기억이 달라붙는다. 그리움이란 게 그렇다. 짐정리를 하다가 나온, 아랍어가 적힌 몇 년 전 집 앞 슈퍼 비닐봉지를 보고 마음 한편이 아린 것. 유리병을 감싸고 있던 바다 넘어 건너온 신문을 곱게 접어서 보관해 둘 수밖에 없는 마음. 누군가에게 받은 포스트잇 쪼가리 하나라도 다음이라는 기약 없이 헤어진 사람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서랍에 고이 넣어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저녁메뉴 오므라이스 or 닭갈비 고르시오

- 오 둘 다 좋아

- 그건 선택지에 없잖아

- 닭갈비. 맵게


닭가슴살은 해동해 보니 상한듯했다. 언니 말의 의하면 상할 정도로 오래되진 않았는데. 밀봉이 잘 안 돼있어서 그런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익히면 괜찮으려나 고민하다가, 구글을 잠깐 뒤지고 (“can frozen chicken go bad” “how do you know if chicken has gone bad”) 여기서 식중독에 걸려 병원에 가야 한다면 언어도 안 통하고 보험 처리도 복잡해지니 모험은 하지 말아야겠다 결단했다. 결국 닭가슴살 두 덩이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만들어둔 소스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냉동고에서 떡볶이 떡을 꺼냈다. 저녁은 떡볶이다. 탕탕탕.


언제나 그랬듯 싸우고 난 후 짧게는 몇 분 길게는 하루쯤 지나 별다른 얘기 없이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도 역시 화해라고 하기도 민망한 대화가 오갔다. 웅얼웅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해’ 또는 ‘다 원위치로 돌려놨네?’ ‘응.’ 정도.


언니는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던 날에는 집에 와서 음식이나 예능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이다. 주말에 여유가 있다면 라면과 함께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놓고 네일아트나 보석십자수, 마늘 까기 등 아무 생각 없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게 힐링이라고 한다. 집에 혼자 있어도 이어폰을 쓰는 나는 소음에 예민한 편이지만, 언니 집에서 유튜브 소리가 (언니의 숨넘어가는 돌고래 웃음소리도) 시끄럽다 하면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기 집에서까지 신경 써야 되냐는 말에 할 말이 없어 그냥 눈알만 굴리고 있다. 무엇을 먹을 때는 누가 쫓아오듯이 음식에만 집중하는 나와 달리 언니는 항상 영상을 틀어놓고 밥을 먹는다. 맵고 달고 뜨거운 음식을 어려워하게 된 나와 달리 언니는 한국에서 라면 수프만 1kg 사가서 구하기 쉬운 인도미 면에 첨가해 먹는다.


한창 떡볶이를 만들고 있을 때 열쇠 소리가 들리고 언니가 집에 들어왔다. 입구에서 부엌 쪽으로 들어오는 문가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언니를 보고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뭔데? 울어? …에? 왜 울어?"

"나는, 네가 이럴 줄 알아서, 밖에서 다 울고 오려고 했는데-"


오늘 날씨가 딱 밖에서 울기 좋은 약간 쌀쌀한 날씨랬나. 울기 좋은 날씨가 어디었어. 언니는 “good-to-cry-to-songs"를 들으면서 (몇 년 전 데이터에 의하면 언니의 "울음" 노래 리스트에는 김보경의 혼자라고 생각말기, 손디아의 어른, 이런 류의 노래가 있었던 것 같지만, 최신 노래로 업데이트되었을지도) 해가 다 진 어두운 집 주위를, 찬바람 맞으며, 훌쩍훌쩍 울면서, 혼자 몇 바퀴 돌고 왔단다.


"집에서 울면 너 싫어할 것 같아서, 너 이렇게 어색해할 거 알아서-"

미리 울고 온 게 소용이 없었는지 결국 또 아랫입술이 떨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오. 저런.


손에 나무주걱을 쥐고 삐걱거렸다. 원체 진지한 분위기를 어려워하지만 가족이면 더욱 뚝딱거린다. 애써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덤덤히 냄비만 바라보며 고장 난 듯 - 언니 집인데 뭘, 집에 와서 울어도 되는데, 나는 그냥 딴짓할게, 내가 뭐 어떻게, 토닥토닥 해주리?, 그래서 내가 매운 거 했어, 여하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왜 속상한데, 아니면 마저 울던가 - 괜히 쓸데없는 말만 반복했다.


언니는 올해 고3 친구들의 class sponsor, 즉 담당 선생님이라 수학여행 등 여러모로 계획할 일이 많다고 했다. 같이 담당하는 두 선생님들이 언니보다 경력이 많은지라 의견이 계속 엇갈리고, 일은 언니에게 다 넘기면서 훈수는 어지간히 두나보다. 언니는 또 어떤가. 하려면 제대로, 기왕이면 완벽히,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것 없이 하니 맘고생 안 할 리가 없지.


언니와 몸싸움까지 가도록 심하게 다툰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중 한 번은 중학교 무렵 내가 쌓아놓았던 불만을 늘여놓으며 시작되었다. 언니는 유난히 낯을 가리는 나를 대신 소개해주는 편이었고, 자랑스러운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나는 언니의 말들이 나를 가두는 것 같다 느꼈고, 나를 서서히 알아가야 했을 사람들이 나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언니에게 ’언니가 나에 대해 도대체 뭘 아느냐,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주는 게 다르고 매일 바뀌는데 이제 나다울 수가 없다‘며 짜증을 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끔찍이 아끼던 언니는 ‘내가 너랑 몇 년을 살았는데 어떻게 너를 모른다고 하냐, 내가 동생 얘기도 내 맘대로 못하냐‘며 서운해했고, 결국 부모님이 중재에 나섰다.


인정하기 싫지만 언니는 나를 잘 안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잘 안다. 집에 와서 울기 시작하면 경악할 나를 알고 밖에서 머리를 식히다 온 거다. 내가 내 나름의 배려를 했던 것처럼 언니도 언니 나름의 배려를 하고 있었다. 설령 그게 서로가 생각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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