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쉬어가는 집
"자, 여기 보온병에 계피 생강차 있고, 저건 인절미. 오늘 만든 거 산거라 맛있어."
엄마가 차 앞 좌석에서 몸을 돌려 민트색 보온병을 건넨다. 흔들리는 차에서 조심스럽게 뚜껑을 연다. 순식간에 진한 계피향이 차 안에 퍼진다.
"응. 엄마 아빠도 먹었어?"
"어. 이게 점심이었어. 아, 너 옆에 있는 장바구니에 까르프에서 산 도너츠도 있는데 관심 있어? 없지? 우리 이케아 잠깐 들렸다가 밥 먹으러 갈 거니까 저녁 자리 남겨놔."
이-케-아. 미국에서는 아이-키-아로 발음하더라. 전해 들은 말이지만 언니의 스위디쉬-아메리칸-절먼 전 남자친구가 스웨덴에서도 이케아라고 발음한다고 했단다. 본토 발음은 이-케아에 가까운데 미국사람들은 맘대로 발음을 바꿔 부르냐 투덜거렸었다. 실제로 테네시에는 Milan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몇 개 더 말해보자면 Paris, Lebanon, Manchester, Athens도 있다) 밀라노, 밀란도 아닌 남부 영어식으로 마-일른 이라고 발음한다.
공항에서 차를 타며 얼핏 보았지만, 옆으로 눈을 돌려 접혀있는 옆좌석을 다시 살펴본다. 트렁크부터 빽빽하게 짐이 실려있다. 누가 보면 부모님도 공항에서 나온 줄 알겠다.
옆자리 창문까지 가리는 배추와 팔꿈치에 닿는 대파, 장바구니에서 삐죽 튀어나온 바게트를 보니 영락없이 장 보고 오는 사람들이다. 요르단 수도까지 내려올 일이 자주 없으니 이렇게 공항에 올 때마다 아시안 마켓, 한인 야채가게, 까르프, 돼지고기 가게까지 한 바퀴를 돌고 XL 사이즈 장바구니 네다섯 개와 아이스박스 2개를 가득 채우고 롱라이프 유유도 한 박스 챙겨 돌아간다. 어느 날은 언니를 공항에 내려준 후 쇼핑을 시작해 언니가 튀르키예에 있는 언니 집에 도착한 후에나 쇼핑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엄마 아빠 장 보는 시간이 언니 비행보다 오래 걸린 셈이다.
옆에 배추랑 무가 있는 걸 보니 엄마는 오늘 밤이나 내일 김치를 담그느라 바쁘겠다. 그 뭐냐, 한국 가정집에 하나씩 있다는 어린이 하나 족히 들어갈만한 대야가 집 어디선가 숨어있다가 나타나겠지. 엄마는 언니를 만나러 갈 때 김치를 담가주고 오곤 하는데, 이 초특대 대야가 없어서 안 쓰는 큰 쓰레기통에 배추를 절였다고 했다. 어차피 김치 외에는 다른 용도가 없으니 언니는 대야를 마련할 생각도 없었겠지만, 있었더래도 어느 가게에서 구할 수 있을지 가늠이 안 갔다.
내가 고기인지 야채인지 빵인지, 짐에 파묻힌 썩 나쁘지 않은 익숙한 안정감을 느끼면서 좌석에 파고들었다. 그리웠던 상표들과 좋아하는 냄새와 바스락거리는 아이 러브 요르단 장바구니 옆에 있으니 집에 온듯한 은근한 설렘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 아파트 정문 경비원에게 "택시 lutfen(please)?"이라고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언니는 자기 얼굴만 봐도 택시 부르는 줄 안다고, 나중에 쿠키라도 구워서 선물해야겠다고 한다. 경비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가 도착했다. 이제껏 튀르키예 택시기사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짐을 보자마자 내리셔서 트렁크에 실어주시고 또 내려주셨다. 한국에선 주로 잘못걸렸다는 눈초리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운이 좋아야 너스레 떨며 넘어가는 투덜투덜 잔소리지, 거절을 당한 적도 말 그대로 혼나본 적도 있다.
전날밤 입모양으로 몇 번 연습해 봤던 도착지를 말했다. 키즐라이. 구벤파크. 기사님이 뭐라 뭐라 하시는 중 "공항"이라는 단어가 들려서 아-공항버스!라고 답하니 또 대답을 하셨는데 같은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여행을 그만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과연 내 말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여행객에게 너그러울 수 있을까.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기사님이 "Have a good evening"이라고 인사를 해주셨다. "çok teşekkürler!" 나는 최대한 티 나게 눈을 휘고 마스크 밑으로 밝게 웃어 보이며 언니가 하던 인사말을 떠올렸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주시는 기사님께 아마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지금은 오전이지만 굿 이브닝이던 모닝이던 애프터눈이던 나이트이던 괜찮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국에서 서투른 영어라도 인사해 주는 기사님이 고마울 뿐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던 수많은 나라에서 실수하는 나를 웃어 넘겨주던 사람들은 샐 수도 없이 많았겠지.
상장을 내밀어주던 교수님이 ’congratulations‘라고 축하해 주셨을 때 한 손으로는 상장을 잡고 한 손으론 악수를 하고 사진까지 찍어야 된다니 정신이 없어 나도 ‘congratulations’라고 답했었다. 저 같은 학생을 두시다니 교수님도 축하드려요.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 ‘have a great flight’ 같은 류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you too!‘라고 외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영어가 느는 만큼 한국어는 어눌해지고 한국어 어휘가 좋아질수록 영어는 버벅거린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나 보다 생각한다. 3개 국어를 해야 하는 부모님은 한국어를 하다가 아랍어나 영어 단어가 나오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아랍어가 늘수록 가끔 말하고 싶은 단어가 아랍어로는 생각나는데 한글로는 생각이 안 나 애를 먹긴 하지만.
집에서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고, 직장에선 영어를 하는 언니는 밖에선 부족한 튀르키예어 몇 단어를 써먹는다.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러 독일에 갔을 때, 독어도 딱 그 정도로 (기본적인 인사 정도로) 할 줄 알면서도 마트에선 무의식적으로 독어가 아닌 튀르키예어로 대답했다고 했다. 4박 5일 정도 있었나, 마지막날에 겨우겨우 독어 몇 마디가 나왔다고. 아빠 역시 튀르키예까지 와서 계속 아랍어 단어들이 튀어나왔더란다. 택시에서 짐을 내려주는 기사님에게 "슈크란"이라고 읊조리는 아빠한테 거기서 아랍어를 하면 알아듣냐고 면박을 줬더니 내가 아랍어를 했냐며 멋쩍게 웃었다.
“First time?”
입국심사관이 눈을 들어 날 흘깃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숙인다. 손은 여전히 여권을 바삐 넘기고 있다.
“In Jordan? No, third time. No, fourth? Fourth. But I got a new passport.”
네 번째인데 왜 여권에 전에 받은 요르단 비자가 없는지 물을까 새로 발급받은 여권이라는 점을 급히 덧붙인다.
“Where are you going?”
“Mafraq”
“Al-Mafraq?”
심사관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옆자리 심사관을 쳐다본다. 여기서 그 동네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다. 뭣하러 거기를 가냐는 목소리였지만 마프락이 맞다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Okay, I need the address”
핸드폰에 적어온 상세주소를 보여준다. 벌써 4번째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올 때마다 주소가 바뀌는 바람에 외우지는 못한다. 이름을 확인하고, 지문을 찍고, 사진도 찍고, 가족을 만나러 왔으며 3개월 정도 있을 거라는 대답을 하면 몇 분 전에 다른 카운터에서 구입한 작은 우표 모양의 스티커가 여권에 붙여진다. 40 디나르로 구입한 이 나라에서의 3개월이다. 바코드 스티커도 하나 부여되는데, 저번엔 여권 뒷면 센터에 떡하니 붙이더니 이번엔 거기 코로나 테스트 큐알코드가 붙어있어서 그런가, 서명란을 바코드 스티커로 가려버렸다.
여권을 돌려받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집을 찾으러 내려간다. 여행으로 긴장하고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덮고 있는 익숙한 베이지색의 타일, 길쭉한 기둥, 느긋한 사람들, 겨울에도 따가운 이곳의 햇빛. 무언의 안정감. 어쩌면 한국에선 없는 편안함. 약간의 설렘. 순간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진다. 결국 또 여기까지 와버렸네. 집이다 집.
"여기 쌀타가 괜찮더라고. 예멘에서 사 먹던 거랑 비슷해. 할바도 딱 이렇게 올라가 있고."
“나 파술리아도 시키면 안 돼? 쌀타랑 파술리아랑 뮬라와랑...자하윅. 샤이도. 밥 종류도 시킬 거야?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파술리아 시키지 말까? 아냐 난 파술리아 먹어야 되는데. 다음에 오면 저거 부침개 같은 것도 먹을래."
비행기에서 내린 후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마치 밤새고 난 뒤 아침의 모습으로 버틴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온다. 아빠는 저번부터 밥 위에 고기가 올라가 있는 메뉴가 먹고 싶었다며 태블릿에 담긴 메뉴판을 요리조리 클릭해보고 있다. 엄마는 아빠가 아무거나 냅다 시킨 후에 생각했던 게 이게 아니었다며 투덜댈까, 옆에서 만디는 무엇이며 브리야니는 무엇이며 캅사는 어떻게 다른지 설명을 한다. 저녁치곤 늦은 시간이지만 식당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가득 차있다. 부모님이 새로 뚫은 예멘 식당인데, 공항에 올 일이 생길 때마다 들린다고 한다.
노곤노곤하니 잠이 몰려온다. 식당에 오기 전 들린 이케아에서 커피 한잔을 셋이서 나눠 마셨다. 엄마는 내가 지낼 방에 달아 둘 커튼을 고르러 갔고, 나는 그동안 아빠 앞에서 꽤 오래 조잘거렸다. 그 커피 몇 모금을 안 마셨다면 지금쯤 깨어있기 힘들었겠다 싶을 정도로 피곤하면서도 오랜만에 예멘 음식을 먹을 생각에 조금 들뜨기도 한다.
몇 주 전부터 엄마는 ‘그래서 여기서 뭘 할 예정인지’ 묻곤 했다. 오랜만에 3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같이 지낼 텐데, 뭘 같이 해주거나 준비해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 하루 이틀은 엄마랑 같은 침대에서 자고는 했다. 어두운 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손을 만지작거리며 울먹거린적도 있더랜다. 물론 들키면 민망하니 안 우는 척을 했지만 결국 걸리곤 했다. “중고등학교 5년동안 기숙사에서 살았으니 나중에 성인되서 엄마랑 5년 같이 살거야,” 그때 함께 못 산 시간을 매꿀거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잠결에 툴툴댔던 이야기를 몇 년 뒤에도 가끔 꺼내는 엄마를 보니 어지간히 기억에 남는 말이었나보다.
무엇을 하고 싶냐는 엄마의 질문에 나는 별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 거야. 이 나라에서의 일상에, 같은 지붕아래서의 익숙한 매일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면 - 아침마다 내리는 커피에 내 몫도 있다면, 오늘 일하면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 때 나도 그 자리에 있다면, 마트에서 같이 먹을 간식을 고를 수 있다면, 주말 계획을 짤 때 나도 항상 포함된다면, 집에 오는 길에 함께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는 사치를 부릴 수 있다면 - 그러면 그저 행복한 3개월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