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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Jul 13. 2023

차별하고 차별받는 세상에서

2022년의 생각정리

산타 역을 자처한 부모가 머리맡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두고 가던 시절, 한 아이의 집 현관에는 아프리카에 굶는 아이들을 위한 저금통이 있었다. 길게 두진 않았고 집에서 자체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니 아마도 유치원이나 교회에서 받아 왔었을 것이다.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태어난 지 10년도 안 된 아이는 그렇게 한 나라도 아닌 그 거대한 대륙에 거주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채,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얼굴 없는 집단을 위해 동전을 하나씩 모은다. 지구 반대편에서 배고파 괴로워하는 어느 부족의 앙상한 흑인 아이를 생각하면서 밥을 남기지 않고 꾸역꾸역 먹는다. 부모는 그런 죄책감을 가르친 적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 어디서 배워왔는지 의문일 뿐이다.


추후 아이의 키가 두배로 뛰어넘을 때까지 아이는 의문을 묻어두었다. 아이가 학교를 아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불쌍한’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동은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기회로 마케팅되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을 봐요. 당신은 더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얼마나 운이 좋나요.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건넨 후 그 만족스러운 뿌듯함, 마음이 채워지는 따듯함은 팍팍한 사회에서 찾을 수 없어요. 잃는 것보단 얻는 것이 많답니다. 자신을 위해 선행을 베푸세요.”


남의 불행(그것마저도 그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라 일상일 수도 있음에도)이 친분도 없는 사람의 비겁한 자존감 올려치기를 위해 소비되었다. 한 아이의 얼굴이 미디어에 오르락내리락하며 먼 나라 사람들에게 착한 일 했다는 기분을 선물하기 위해 존재하곤 했다.


몇 년 뒤, 초등학교 1년을 마치고 아이는 아프리카 대륙의 작은 일부분에 발을 딛는다. 케이프타운 근처 마을에서 11개월 정도 생활한다. 그 몇 개월 도중 아이의 할머니가 방문한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야 들은 말이지만, 할머니는 손녀의 교실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며 ‘아이고, 그 깜둥이들과 같이 수업 듣는 너를 보면서 내가…”라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고 한다.


손녀가 다닌 학교는 교복을 입어야 하는 사립학교였다. 학비가 비싼 편이었고, 국립학교보다 백인의 비율이 컸으며, 선생님들도 백인이 과반수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시선에는 백인들은 흐릿하거나 빛났고, 흑인들만 사진처럼 데인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영어를 못해서 다시 1학년으로 시작한 학교 첫날, 안경을 쓴 포근한 인상의 선생님은 햇빛이 비추는 창가 앞 의자에 앉아 그림책을 읽어주셨다. 선생님을 마주 보며 바닥에 둥글게 둘러앉은 학생은 15명도 채 안되었지만 그중 한국사람은 두 명이었고, 흑인과 백인이 섞여있었다. 2007년도에 선생님이 보여주신 책은 1950년대에 히트를 쳤던 미국의 그림책 시리즈였다. 주인공은 단정한 반바지를 입은 갈색머리의 남자아이와 원피스에 흰 양말, 구두를 신은 곱슬 금발머리의 여동생, 그리고 그들의 점박이 강아지 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정장을 입고 회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집을 돌본다. 화목한 가정은 흰 울타리와 반듯이 깎은 잔디가 이어지는 깔끔한 주택가에 살았다.


아이는 자신이 이 교실 안 사람들과는 다른, 신기한 이방인의 신분이니 당연히 책에 자신을 닮은 사람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 옆에 앉은 흑인 친구를 닮은 사람 또한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반대쪽에 앉아있던, 한부모가족의 외동 친구를 닮은 인물 또한 없었다. 헬로와 ABCD 정도의 영어를 하던 아이는 그날 ‘LOOK’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배웠다. 영어를 한다는 것은 저런 모습이구나. 저곳에 내 자리가 있을까. 우리 가족은 저렇지 않은데.


아직 짧은 인생사지만 한국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일까. 하루종일 티브이를 틀어놓고 계시는 할머니 집에서 반복적으로 봤던 유니세프 광고 때문일까. 어쩌면 너무 적고 한정적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편견은 무섭게도 빠르게 아이의 머릿속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아공에서의 한 학기 동안 아이의 기억에는 자신의 까만 직모 머리카락을 만져보려 손을 내밀고 달려드는 흑인 아이들이 새겨졌다. 트램펄린에서 파란 수영복을 입고 뛰놀던, 눈부신 금발을 양갈래로 땋고 정원 생일파티를 즐기던 여자아이도 새겨졌다. 아이는 자신이 믿는 현실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다.


1년 뒤, 아이는 중동에 한 나라에서 살게 된다. 1학년부터 8학년까지 학생이 총 20명이 채 안 되는 외국인 학교에 주 5일 다닌다. 선생님은 여전히 백인뿐이다. 아이는 그 고고한 성에서 그 나라의 사람들과 말을 거의 섞지 않으며 5년을 가까이 보냈다.


가족이 차를 타고 도심에 들어서면 창문을 두드리며 돈을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때는 부모님이 빵이나 과자를 건네주기도, 차에 놔두었던 동전을 손에 담아주기도 했다.


한국 석유공사와 대사관 사람들은 모두 3층짜리 대저택에서 살았다. 정원이 있고 현지인 경비원이 있었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저들은 우리 가족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가 보다, 생각했다. 현지인 중에서도 저런 집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외국인이란 현지인보다 잘 사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이미 뿌리 깊은 잡초처럼 퍼지고 있었다. 저들은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인가 보다 판단했다. 생테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선정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는 주위에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는 모습에 익숙해졌다. 길을 걸을 때마다 “씨니” “야바니” “중국인” “일본인”을 소리치는 목소리를 끝도 없이 들었다. “니하오” “아이 러브 유” “하우 아 유” 역시나 귀에 박힐 정도로 듣는다. 아이의 집 앞 골목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들은 담장 위로 공이 넘어올 때마다 도어벨을 시끄럽게 울렸다. 부모님이 없을 적에는 철문을 기어올라 얼굴을 내밀고 자매를 내려다보며 소리치곤 했다. 얼굴과 이름을 알던 지인들이 납치되었다가 풀려나거나, 행방불명이 되거나,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도 듣는다.


그럼에도 그 나라는 아이에 마음에 가장 애틋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좋은 기억이 될 수 없는 무거운 사건도 있지만 가벼웠던 나쁜 기억은 금세 헛웃음으로 회상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특별한 날마다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막내아들을 시켜 아이의 집에 배달하는 집주인 가족과, 찻 잔이 빌 틈이 없도록 차를 따르는 사람들과, 장식품이 멋있다는 말만 뱉었을 뿐인데 집에 갈 때 손에 쥐어주는 사람들과, 당당하고 포기하지 않던 여성들과, 왜 알파벳만 계속 가르치냐는 어머니의 말에 너네 딸들이 좋아하니까,라고 답하던 아랍어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일까. 웬 여학생들이 찾아와 너무 비싸다며 뒤도는 척했을 때 오케이 오케이 툴툴대며 바가지 씌우길 포기하고 가격을 내리는 썩소의 액세서리 상인들이 있어서 그랬을까. 어려서, 걱정은 짧고 매일 즐겁게 놀 궁리만 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어쩌면, 그 나라에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감내할 뾰족한 한마디, 흘기는 시선, 육체적 노동, 숨기지도 않는 당당한 악의와 당연히 국민에 비해 두 번째로 취급되어야 하는 현실이 내가 그 나라에서 경험한 무지에 비하면 무거운 짐이기 때문일까.


성인이 된 아이에게 사람들은 그곳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고, 아이는 이 나라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포와 가난의 나라, 야만적인 곳으로 낙인찍히지 않도록 좋은 기억들을 수없이 뱉어낸다. 그의 수많은 좋은 기억 중 나쁜 기억 하나가 그 나라를 뉴스로만 접한 이들이 편견을 취하는 일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이 눈썹을 잔뜩 내리고 동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짧은 대화가 될 것이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자랑을 해야 한다면 자신이 불행 아닌 불행을 이겨냈다는 싸게 팔릴 이야기 보단 자신이 아닌 가족을, 그 나라를, 그 사람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하루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잠깐 스쳐간 이방인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그 나라에 대해 말하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날이 오더라도 사람들이 그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는 부담스러운 일을 너무 짖게 드리우질 않길 바랐다.


한국에서 그 나라는 중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테러와 전쟁의 나라로 소개되었다. 일부다처제와 아동결혼의 나라로 소개되었다. 꼬리표처럼 붙어다는 단어들이 매일 늘었지만 그중 긍정적인 단어는 없었다. 그런 나라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렇게 알려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쏟아져 나오는 댓글은 그의 마음에 깊게 꽂혀 들었다. 그저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역시 미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도 미웠다. 그들을 변호하는 말들을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되뇌었다.


하루아침에 다시는 집에 돌아갈 수 없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날이 있는가. 어쩌면 내일 가족과 영영 연락이 끊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언젠가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가장 소중한 짐 몇 가지만 챙겨 나온 적이 있던가. 나오면서도 두고 오는 공간과 사람들이 생각나 죄책감에 시달린 적이 있는가.


머릿속에 그 나라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길래, 그 사람들에게 무슨 모습을 기대하고 투영했길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모습을 나무랐을까. 이름 없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감당하며 그저 "수준을 알고" 묵묵히 노력하는 자만이 '진짜'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어째서 매 순간 치열하게 불행함을 증명하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는 머리 숙여 죄인처럼 고마워해야 하는 배려가 되는 걸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다. 맞다. 그들도 당연히 꿈이 있고 가족이 있고 한국 음식을 좋아할 수도 케이팝을 즐겨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모습이더라도, 사회에 기여하고 잘 적응하는 "성공한"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더라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주어진 일이 잘 맞지 않더라도, 눈에 띄어도, 일상의 변화를 가져다주더라도,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여전히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당신과 비슷한, 공감하기 쉬운, 눈높이가 맞는 사람으로 그들의 존재를 설명하고 소비하기 쉬운 똑같은 이야기만을 계속 만들어낸다면 한계에 다다르지 않을까. 내 자리를 빼앗지 않고 누리는 것들을 위협하지 않는 순수한 약자로, 나는 잠깐 넘어갔다가 언제든 발 뺄 수 있는 다른 세계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미 너무나 많은 “그들”과 “우리”가 있다. 도움을 주려는 목표로 다가가 목표가 달성되면 관계는 끝난다. 우월하고 안전한 저 산 위에 성에 남기 위에선 그들이 우리가 되게끔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산을 내려갈 수는 있지만 그들이 올라오게 할 수는 없다. 성벽을 허물고 산 없애고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추후 아이는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어 서유럽에 어느 기숙학교를 간다. 집에 걸어가는 길에 남학생 무리로부터 칭-챙-총 같은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그 한마디를 하고 서로를 장난스럽게 치면서 까르르 웃음을 머금고 지나간다. 그가 다니는 학교에 한국인은 꽤 많지만 여전히 흑인은 손에 꼽는다. 흑인 선생님은 더욱더 손에 꼽는다. 그는 그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의 어머니는 백인들 앞에선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했다. 물론 대부분 덩치가 커서 그럴 수도 있겠다. 피차 외국에 나온 사람들이지만 왠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리 있게 말을 못 하고 알아듣기도 힘드니 이해하려고 집중하는, 또는 얼굴에 힘껏 힘을 주고 차근차근 말하는 어른을 올려다보는 어린이가 된 것 같았다. 어깨가 수그러든다. 아이는 부모보다 영어를 잘하고 서양문화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부모가 써야 할 이메일을 대신 써서 부모의 이름을 빌려 학교에 보냈다. 교무실에 자녀가 가서 말하는 게 더 빨랐다. 영어로 적은 글을 읽고 고쳐주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또 저런 말은 무슨 뜻인지 통역한다. 부모가 나를 더 이상 대변해 줄 수 없음을 아이는 이해한다.


또다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유통기한이 있는 비자를 들고 대학에 입학한다. 어느 날 유학생 페이스북 그룹에 선물을 가지고 가라는 글이 올라온다. 빨래통 안에 인스턴트 맥엔치즈, 오트밀, 사탕, 98센트 샴푸 바디워시, (유학생 중 운동선수가 많아서 그런가) 역시나 98센트 데오드란트만 5-6개 등 생필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근처 교회의 어린이들이 모금을 하고 돈을 모아 구입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직접 선물을 전하러 올 테니 유학생 라운지에 들리라는 공지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써주고 고맙다는 말도 전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날 일부러 늦잠을 잤다. 하루 뒤 찾아가 알람을 못 들었다고 얼버무렸다. 선물을 아예 안 찾아간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기다렸다가 그들 몫까지 챙겨가던 학생도 있었다. 물론 누군가에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아이들에게 굳이 “유학생”이, 모국과 가족을 떠나온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모금까지 해가며 도와야 할 약자로 인식하도록 가르쳐야 했을까. 유학생이 보답하는 방법이 - 외국어로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이 - 굳이 우리가 그들과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임을 강조하는 방법이어야 했을까. 우리의 “다름”이 아이들을 위해 소비되어야 했을까. 유독 친절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진 앉았던 친구들과 연말 때마다 불쌍하다고 인중을 잔뜩 구기며 ‘자비롭게도 집을 열어’ 주었던 교수들은 나를 무슨 시선으로 보았을까.


근처 대형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날 아프리카에 그 교회가 후원하는 사람들이 가축을 살 수 있도록 모금하는 광고를 했다. 사진 속엔 흑인 한 명이 흙바닥을 바탕으로 염소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여기 아이들도 이제 아프리카 하면 저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프리카, 하면 내가 조금 나눠서 생계를 유지시키는, 흙먼지 날리는 자연 속에 사람들. 나는 그들보다 잘 살고, 더 편하고, 더 행복하고, 더 복 받았지. 정말 신께 감사할 일이야.


그가 콕 집어 말할 수 없던 답답함을 느낀 지도 3년째, 졸업을 하고 도시로 이사를 갔다. 거리에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보고 손쉽게 온갖 세계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니 미국에서 못살겠다고 선언하던 모습도 달라졌다. 그의 사무실엔 흑인도, 아시안도, 라틴엑스도, 성소수자도 있다. PPT사진을 고를 때마다 충분히 다양성을 지켜냈는지 고민한다. 숨통이 조금 트이면서도, 그 큰 사무실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을 만난 적은 없으니, 비자를 생각하며 머리를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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