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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Jan 13. 2023

남은 것들로 세워진 우리 집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공간에서


“어때? 어때? 아는 냄새나지?”

기대가 가득 찬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언니를 본다. 1년 전 요르단에 혼자 입국한 날, 공항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실실 웃었던 나처럼 언니도 같은 기분일지 궁금하다. 요르단에 처음 오는 언니에게 5번은 넘게 한 이야기다. 분명 처음 와보는 나라인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제 집에 돌아왔다는 기시감이 든다고. 물론 요르단과 예멘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러나 미국 마트 해외식품 코너에 밀키스가 나타났을 때 그 희열처럼 작은 연결고리라도 집을 떠나온 사람에겐 미소를 지을만한 이유다.


햇빛이 쏟아지는 긴 유리창, 높은 천장, 갈색 패턴을 띄고 있는 타일 바닥, 빛 바렌 베이지색으로 페인트칠된 벽과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아랍어 속에 걷고 있으니 잠깐이라도 5년 전 예멘에서 살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건조한 공기, 모래 쌓인 타일 바닥을 걸레로 닦으면 나는 비 온 뒤 흙냄새, 여유롭게 수다 떠는 입국 심사원. 근래 미국, 독일, 한국만 왔다 갔다 했던 나에겐 한때 익숙했지만 잊고 지냈었던 풍경이다. 기억을 잠가놓았던 자물쇠가 풀리고 흐릿했던 추억들이 쏟아져 나온다. 부모님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하시지만, 언니는 뭔가 알 것 같기도 하다며 끄덕인다.


아마 성지순례 투어를 하러 온 듯한, 챙 넓은 사파리 모자와 화려한 셔츠로 무장하신 백인 어르신 무리를 지나 입국심사를 거쳤다. 부모님은 이까마 (거주비자) 카드를 꺼내고 심사관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스캔한다. 수하물 찾는 곳에서 마지막 가방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결국 언니와 내 가방은 나타나지 않았고, 우린 이제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다며 금세 신고하고 차를 탄다. 언젠간 나타나겠지. 수도 암만에서 나와 마프락으로 2시간을 달린다.


언니와 나는 뒷좌석에서 졸다가, 밖을 보다가, 저거 보라며 어린아이처럼 키득키득 웃기도 한다. 엄마 아빠는 저게 뭔 대수냐며 별 걸 다 추억거리로 삼는다고 한다. 엄마가 잠깐 내려 사들고 오는 요거트 한 통, 야채가게에 가득 쌓여있는 사과, 모스크에서 흘러나오는 아잔, 베이지색의 네모난 건물, 그 위에 튀어나와 있는 물탱크 같이 작은 것이라도 몇 년째 돌아가지 못한 나라를 기억나게 하는 요소라면 우리 앞에 펼쳐진 수많은 풍경들 중에 가장 눈에 띄고, 우린 하나씩 집어내어 이야깃거리로 만들다 다시 곯아떨어진다.


밤이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아빠가 철문을 열면서 이 옆에 있는 다른 문은 집주인이 쓰는 문이라고 한다. 기내 가방을 끌고 빌라 이층으로 올라가 엄마가 열쇠를 가지고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휴대폰 화면에서만 보던 광경이 펼쳐진다. 집이다, 처음 와보지만 집이다. 언니와 내가 기숙사로 떠나 있을 때 엄마 아빠가 예멘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 정착을 했으니 이제 여기가 본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가 방학 동안 쓸 공간의 이름은 ‘손님방’이지만 말이다. 아마 엄마는 며칠 전부터 등받이 없는 연두색 소파베드에 이불을 깔고 이동식 행거와 옷걸이를 꺼내놓고 우리가 쓸만한 물건을 골라서 방에 들여놓으며 부지런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덮고 자는 이불이고 속옷은 어디에 두면 좋은지, 어떤 통이 샴푸인지,익숙하겠지만 난방도 안되고 에어컨도 없으니 샤워하기 전에 화장실에 있는 히터를 틀어놔야 한다는 이야기와 가끔 탱크에 물이 안 들어올 때도 있으니 물 좀 아껴 쓰는 게 좋을 거라는 이야기까지 엄마에게 쭉 브리핑을 받은 뒤에 집을 천천히 둘러본다.


비록 처음 오지만 익숙하고 편안했다. 페이스타임으로 계속 본 배경이라서 라기 보단 전에 살았던 집에서도 보였던 부모님의 스타일이 녹아들어 있어서랄까. 우리 집에 컬러 팔레트는 그야말로 뒤죽박죽, 테마가 있다면 믹스 매치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가는 장식품, 이야기가 있는 살림이 특징이다. 연보라색 방수 식탁보로 덮은 포장마차에서 볼 법한 플라스틱 식탁과 식탁을 둘러싼 플라스틱 의자 4개, 종이박스를 자르고 끈을 꼽아 만든 서랍, 가스통에 연결되어 있는 가스레인지, 내가 버린다고 했지만 굳이 바다 넘어까지 고이 들고 와 여기저기 붙어놓은 내 그림까지 모두 우리 집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뜬금없이 코트 걸이에 꽂혀있는 인형, 누구 집에서 꺾어와 플라스틱 요거트 용기에 담가놓은 화초, 영화 보기 딱 좋게 설치되어 있는 프로젝터, 애매하게 남은 향초를 합쳐서 태워보려 한 흔적, 어는 집에서든 변함없이 보이는 엄마와 아빠의 습관과 손길이 곳곳에 닿아있다.


이 집에선 세트나 한 쌍을 찾기 힘들다. 부모님은 몇 주 안에 집다운 집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모으셨다. 떠나는 부부의 가구를 사기도 하고, 누군가 버리는 물건을 줍기도 하며 여느 때처럼, 모든 것을 처분하고 다시금 집을 꾸리려 했을 때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흔적을 모아 우리만의 손때를 묻혀 다시 시작했다. 식칼 하나, 콘센트 하나까지 거의 모든 물건이 우리 것이 아니었지만, 이젠 우리 집의 일부분이 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히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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