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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Sep 14. 2023

여름 진주

올여름은 무척이나 더울 것 같아서 만발의 준비를 했다는 미인의 말이 나를 먼 곳까지 불러내었다. 내가 서울에서 탄 버스가 어느새 진주의 톨게이트를 지나고 남강을 돌아 종착지로 향한다. 


앉은자리의 창문 너머로 터미널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얼굴이 보인다. 내가 그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미인의 눈빛이 나를 먼저 딛는다. 거기에 오랫동안 사람을 그리워하던 여인의 표정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당신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 그 손이 이끄는 집으로 향한다.


파란 대나무를 쪼개고 엮어서 만들었다는 대자리를 제일 넓은 방에 펼쳐놓고, 그 위에서 모로도 눕고 바로도 눕다가, 당신이 두 권이나 주문했다는 무서운 소설을 함께 읽었다. 왜 같은 책을 두 권이나 샀냐는 내 물음에 미인이 웃으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쪽을 읽고 싶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음에도 늘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사람인 양 들떠했다.

서로의 발이나 몸을 포개가며 책을 읽다가, 누가 내 눈썹이나 귓불을 만지면 잠이 온다고 내가 말하자 미인은 나의 얼굴을 자신의 무릎에 놓여두고 웃으며 가만히 내 귀밑머리를 만져주었다. 그게 평화로웠던 나는 이내 잠에 빠졌다.

여름처럼 낮잠을 자고 나서 저녁 찬거리를 사러 큰 마트에 들렀다. 나는 새로 들어왔다는 갈치토막의 빛깔이나 크고 실한 전복의 껍데기 같은 것에 마음이 기울었고, 당신은 우리에게 당장은 필요 없는 희고 검은 조미료들이나 다섯 묶음짜리 과자를 몇천 원에 판다는 매대에서 한눈을 팔았다. 미인은 내게 과자나 조미료를 들고 와서 “이건 어때요?” 하며 수시로 물었고, 내 마음도 들썩거려서 당장 사야 할 것 같다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장을 보고 돌아와서 저녁을 차렸다. 당신이 돼지고기를 푹 삶는 동안 나는 국수를 말아내었고, 그것들을 얼기설기 차려서 직장 동료의 어머니가 나눠 주셨다는 김치와 함께 감사히 늦은 저녁을 먹기도 하였다.

낮에 보던 책을 마저 읽다가, 갑자기 요즘에 새치가 늘었다고 삐죽이는 당신의 눈이 퍽 고와서 나는 뻔히 보이는 흰머리를 코앞에 두고도 "어디? 안 보이는데?" 하면서 샅샅이 머리를 헤집어 겨우 찾은 척을 했다. 머리카락을 뽑을 때 따끔하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당신이 좌우로 고개를 도리질하고, 이내 노곤해졌는지 살며시 책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그런 미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잠들 때까지 놓여두었다. 당신이 잠이 들고 나서도, 나는 무엇이 그리도 그리운지 한참이나 당신의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었다.

마치 잠꼬대와도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고향 거제는 이곳 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미인을 두고, 언젠가 당신과 함께 거제의 해안선을 따라 걷는 모습을 그리다 까무룩 잠들기도 했던,

어느 해의 여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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