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 속의 갑과 을
입사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렇게 회사는 갑이고 나는 을이 된다. 처음부터 ‘갑질’, ‘갑을관계’ 등 폭력과 차별 등을 내포한 의미는 아니었을 텐데 국어 교과서에 언어의 의미가 타락한 경우의 예시로 언젠가 ‘변소’ 대신 ‘갑을’이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때로 이 ‘갑’이 회사나, 장이나, 정규직이 아닌 같은 계약직이 되기도 한다. 계약직이 무기직과 일반계약직으로 급이 나뉘고, 무기직은 정년이 보장된 것과 조건이 있는 것으로 구분되고, 일반계약직은 다시 연차로 급이 나뉘기 때문이다. 층을 구분하여 결혼도, 거주지도 심지어 먹는 옷과 음식도 차별한다는 인도의 카스트가 지금, 여기 대한민국 회사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입사 첫날, 회사의 대외업무에 회사의 간판으로 알려진 사람이 나와 같은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나와 같지는 않다. 정년을 보장받은 무기직이니까. 수더분한 인상에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인상적인 그녀는 사람들 앞에 자주 나서는 사람 특유의 위트를 섞어 신입들에게 왜 여길 왔냐며 얼른 나가라고 했다. 여기는 무기가 되어도 퇴사를 하는 곳이라며 그래서 너희가 이렇게 우르르 들어오게 된 거라고, 그만큼 여기는 처우가 좋지 않다며 자기도 계약직으로 서러움을 겪고 있다고, 기회가 있으면 자기도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언제 나갈지 몰라 10년째 주차권을 연간으로 끊지 않고 귀찮지만 매달 갱신하고 있다고 했다.
입사 첫날,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들은 첫마디가 ‘얼른 나가라’였던 셈이다. 그것도 계약직 중에서 장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녀가 해준 유일한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사실 업계에서 그녀의 명성은 이미 유명했다. 유명 회사의 간판으로서도 그리고 계약직들의 시누이로서도. 나 역시 이 회사로 이직하면서 그녀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루트로 들었었는데 의외로 첫인상이 살갑고 수더분해 보여 소문이 잘못 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카리스마’라는 것이 꼭 앞장서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를 만들어 누군가가 앞장서도록 하는 것도 있구나 하는 것을 나는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만큼 그녀는 타고난 리더였다. 다만 그 리더십을 발휘하는 방식이 긍정적이지 않았을 뿐. 패를 가르고 서로를 경쟁하고 미워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그것을 관찰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콜로세움의 높은 곳에서 검투사들의 경기를 내려다보던 로마제국의 황제처럼.
그녀는 처음에는 모든 것을 포용할 것처럼 다가왔다. 그동안 계약직으로 지내며 네가 당했던 서러움을 나는 먼저 겪었고, 더 오랜 시간을 견뎠고, 그래서 이제 너보다 조금 힘이 생긴 내가 네 대신 앞장서서 너의 변호를 해주겠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속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녀에게 들어간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퍼진 뒤 다시 나에게 칼이나 창이 되어 되돌아왔다. 나에게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함께 일하는 모두를 공평하게 대했다. 그녀가 화두로 삼지 않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모두까기 인형이었다. 그래서 모두 그녀와의 관계를 나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꼬투리 하나만 잡히면 이곳에 존재하는 것도, 그녀의 이직에도 영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와 주로 밥을 먹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함께 밥을 먹고 둘도 없이 친한 사이로 보였던 사람 중 하나를 무능하다는 프레임을 씌워 자신의 그룹에서 몰아냈다. 그녀의 오랜 밥친구이자 10년 가까이 함께 일해 온 동료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를 끌어내리는데 나와 그 동료 사이에 벌어진 일을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입사 후 1개월 뒤 내가 받은 업무는 다음 해 1년의 예산을 따오기 위해 기획안을 쓰는 일이었다. 아직 이 회사의 사업 특색과 내용도, 예산 규모와 프로세스도 모르는데 그것을 쓴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임자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했을지 모르는데 바로 직전 전임자는 휴직에 들어가기 하루 전 날, 두 시간을 나에게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랩을 하듯이 쏟아내곤 육아휴직을 갔고, 그 전 전임자들이 모두 퇴사를 해 그 업무를 해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 업계에서 근무한 경력이 갓 1년, 그것도 타 회사에서 쌓은 것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업무 조정을 요청했고, 그녀가 이것을 이용한 것이다. 팀장이 업무의 경중을 파악하지 못해 신입에게 주었다고.
이때 나는 업무의 경중을 알고 불합리한 일의 조정을 위해 앞장서 주는 선배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나중에 나에게 ‘일을 시키면 안 한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근거로 쓰일 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