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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도 Mar 26. 2021

[새벽 산책] 1.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보다

홍수의 기억 - 인생이란. 살아야 하는 '필연적' 이유

살다 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정신을 차리게 되는 계기. 혹은 정신을 차려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렇게 되기까지 약 1톤의 물과 1리터의 눈물이 필요했다. 대체 이 대목에서 1톤과 1리터가 왜 나오는 거지? 하고 문득 의문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 종중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던지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걸까요?

막상 생각해보면 살아가기 위한 특별한 이유를 막상 대기는 어려운 것 같다. 참 와 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들여다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삶의 이유에 관한 고민들은 공부나 인간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지금부터 기억의 깊은 곳에서, ' 나를 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경험을 한번 꺼내보고자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08년 여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엄마와 함께 어학연수차 필리핀에서 지내고 있었다.

평범한 주말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하숙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더니, 집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필리핀은 당시 워낙 인프라가 열악한지라 태풍이 올 때 정전이 나는 것이 참으로 흔했으므로. 그래서 어두워진 김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방에 들어가서 낮잠을 잤다. 그런데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순간, 나는 물속에 싸여 있었다. 침대는 물에 잠겨 둥둥 떠다니고 있고, 대피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폭우와 홍수로 인해 그 마을 전체가 침수된 것이었지만.)


물은 내 다리를 덮기 시작했고, 방 밖에선 나를 찾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을 힘을 다해 가구들을 헤쳐나가며 문을 열고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강한 수압 때문에 문은 잘 열리지 않았고, 혹여 연다고 할지라도 급류에 휩쓸려 갈 각오를 해야 할 판이었다. 이제 물은 어깨 위를 덮기 시작했다. 급류에 휩쓸릴 것이냐, 방 안에 갇혀 익사할 것이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순간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다. 불어나는 물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신기한 건, 죽음 앞에 인간은 가장 솔직해진다는 것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밖에서 애타게 저를 찾고 있을 누군가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실종이 된다면 한국도 아닌, 타지에서 사라진 딸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갈 부모님을 떠올리자 답답했다. 학교에서 말썽쟁이로 지냈던 지난 날들이 후회되었다.

결국 어떻게는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을 연 순간,  거센 물결에 떠내려갔다. 다리에 그만 힘이 풀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 전체가 제 몸을 휘감았고, 저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날 밤부터 죽음과 나의 공식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다. 가구들과 떠다니는 나뭇가지에 이리저리 부딪혀 생긴 상처보다는, 어린 나이에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알아버려서, 죽음의 문턱을 너무나도 빨리 겪어서, 거기에서 비롯된 아픔이 더 컸던 것 같다. 특히나 산다는 것에 무의미함을 느꼈다.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이래 살아서 뭐하나.” 이런 이야기를 초등학생 때부터 했다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면 공허함이 심장까지 차오르고, 종종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게 몇 해를 살았다. 말 그대로 남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꾸역꾸역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구절이 내 마음 속에 와닿았다.

“너는 비록 세상에 던져진,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난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선택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문득 삶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밑바닥을 차고 수면까지 올라와 다시 숨 쉴 수 있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관점을 조금만 돌린다면, 삶과 죽음은 별 게 아니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끝이 있기 때문에 시작이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두 가지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지 연속선상에 있는 게 아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은 나를 파멸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그 인식은 오히려 나를 살렸다.

우리는 결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죽음을 향한 과정을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중심으로 제 삶을 다시 설계했고, 비로소 다시 다리의 흙먼지들을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부조리로 가득찬 현실이지만 꿋꿋이 버텨낼 수 있는 하나의 '무기'를 가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서, 현재의 순간을 격렬히 사랑한다면,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


"죽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있기 때문에."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과연 유의미한 인생이란 어떤 삶일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삶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많은 방황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제 그 질문에 대한 조그만 실마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바로 유의미한 인생이란, 무의미함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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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느리고 더디다. 종종 의심을 품을 때도 많다. 비록 삶의 첫 선택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지만, 소위 내던져진 삶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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