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도 Mar 26. 2021

#Prolog. 타인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가 있는가?

<자유론(이사야 벌린)>, <분배냐 인정이냐(호네트&프레이저)>

들어가며

    잔액 0원. 물도 끊긴 아파트에 텅 빈 냉장고. 1년 넘게 연체된 공과금까지. "봉천동 탈북 모자"로 알려진 엄마와 아들이 빈곤 속에 변을 당했다. 어머니 한 씨는 정부가 제공하는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소득인정액이 0원으로 나와 가정양육수당과 아동수당도 각각 10만 원씩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기초생활수급이나 다른 복지급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할 구청은 이들의 기초수급 신청을 차일피일 미루었고, 통일부와 사회복지체계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자는 물과 전기도 사용할 수 없고 휴대폰으로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도 없는 빈곤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 죽음은 사회 전반에 복지사각지대의 위험성을 알렸다. 동시에 새터민의 지위나 복지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도 촉발시켰다. 한정된 자원으로는 모든 빈곤층을 지원해줄 수 없다. 수혜자를 늘리려면 사회적으로 동의를 구해야 하지만 여러모로 어려운 실정이다. 일례로 탈북 모자 사건 이후 정부는 기초사회보장 대상 확대를 위해 복지 개편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큰 반발이 일었다. 복지재원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어 충당해야 하는데, 이것이 재산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논리였다. 사건의 대상자가 '탈북자'라는 점도 이념 갈등과 혐오 발언을 불러일으켰다. 새터민 모자 사건은 ‘권리’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각종 논쟁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두 모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마치 처음부터 ‘권리’라는 걸 가지지 못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과연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부정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1) 자유의 두 개념

    갈등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 근원이 되는 '자유'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현대사회에서 자유는 권리와 의무의 복합체다. 이사야 벌린은 <자유론>에서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었다. 소극적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로 표현되며 강제나 방해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 상태에서 개인은 권리를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 적극적 자유는 ‘~로의 자유’로 표현되며 스스로의 결정을 실현하려는 상태를 뜻한다. 즉, 스스로 판단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이나 타인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


소극적 자유 = '~로부터의 자유'
     -> 외부적 강제, 간섭 혹은 방해가 없는 상태

적극적 자유 = '~로의 자유, ~를 향한 자유'
     -> 스스로의 결정을 주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상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모두 적극적 자유이다. 살면서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는 일종의 ‘제한’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적극적 자유를 자신이 어떤 권리를 누리려면 타인의 어떤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상호작용하면 서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이는 권리 행사를 제약한다. 적극적 자유를 행사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권리를 제한하기로 약속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스스로의 권리를 절제할 뿐 타인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를 갖지는 않는다.


2) 분배투쟁과 인정투쟁의 중첩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권리를 놓고 수많은 투쟁이 발생한다. 자원, 직장, 이념, 각종 의사결정 등 모든 형태의 ‘재화’의 양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이다. 석유나 질 좋은 물을 획득하거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면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분배냐 인정이냐>에서 낸시 프레이저 교수는 이러한 투쟁을 ‘분배투쟁’과 ‘인정투쟁’으로 나눈다. 분배투쟁은 정치경제적 계층, 즉 물질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다. 그에 반해 인정투쟁은 사회문화적인 신분, 즉 인간의 개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분류하고 대우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러한 투쟁들은 모두 개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모든 권리를 자유롭게 추구하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자유도 타인을 배제하고 행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제한도 없던 태초의 소극적 자유를 희구하며 타인을 장해물로 여긴다. 한 사람이 돈을 얼마나 가져야 하는지, 한 사람이 어떤 신분에 속하고 그 신분은 어떻게 대우받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규정한다. 분배투쟁과 인정투쟁은 강자와 강자, 약자와 약자,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항시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결국 분배투쟁과 인정투쟁은 개념적으론 구분되나,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동시에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새터민 모자도 마찬가지다. 계층적으로는 ‘저소득’에 속해있었으며, 신분적으로는 ‘탈북자’의 딱지를 안고 있었다. 우리 사회는 타인에게 복지 혜택이 돌아가는 데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하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GDP 대비 복지지출 규모는 OECD 회원국 평균 20.1%의 절반에 불과한 11.1%로 29개국 중 꼴찌였다. 수급 규모나 인력 등 체계 전반이 미약한 상황에서 새터민 모자로 상징되는 복지사각지대는 필연이었다. 또한 새터민은 일정 기간의 사회적응 교육을 마치더라도 취업하기 쉽지 않고, 취업하더라도 낮은 소득에 만족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자는 ‘탈북자’라는 이유로 복지체계에서 소외되는 동시에, 입국 9년 차가 되어 5년 시한의 통일부 관리대상에서도 배제되었다. 탈북자도 아니고 탈북자가 아니지도 않았다. 계층적으로도 신분적으로도 응당 누려야 할 권리를 부정당했다. ‘다르다’는 이유로 ‘없어야’ 했고, ‘없다’는 이유로 무관심과 괄시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는 다 함께 ‘권리’ 혹은 ‘자유’를 누리고자 사회를 만들었는데, 끊임없이 누군가의 권리를 부정하는 듯하다.


"우리에게 타자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는 없다."

우리에게 타인의 권리를 부정할 권리가 주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사실상 이런 주장에는 개인의 권리를 상당히 축소시킬 위험성이 존재한다.

 

권리를 ‘부정한다’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를 망각한다

    어떤 권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어떤 권리는 처음에 있었으나 타인을 만나 사회를 이루며 없어졌다, 모든 권리가 지금도 계속 있지만 여러 이유로 행사하지 않는 것뿐이다 등, 부정한다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에 어떤 정의를 택하든, 현실에서는 “너 그럴 권리 없어!”라는 하나의 말로 발현된다.

    모두가 침착하게 권리를 논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상대방의 권리를 부정하더라도 권리 자체의 의미는 훼손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적이고 현실 속에서 권리를 숙고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누군가의 권리를 부정한다는 이야기도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우리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갈등은 “내로남불(자신에게는 이럴 권리가 있지만 타인에게는 없다)” 식이다. 권리를 부정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어떤 권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주장하게도 된다. 자연히 어떤 권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경시되거나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권리라는 개념 자체가 발전할 수 없도록, 그리고 인류 사회가 진보할 수 없도록 가로막을 것이다. 즉, 타인의 특정 권리를 부정할 수 있다면, 특정 권리 자체가 논의되지 않거나 축소되어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번영을 저해할 수 있다.


또한, 양적 다수(기득권)의 소수 탄압을 용이하게 한다.

    권리의 제한은 주로 제도나 사회적 관습 및 규범을 통해 관철된다. 하지만 제도와 관습은 권리에 대한 다수의 공통된 견해가 반복적 관행, 혹은 합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립’된 결과이기에 간주관성과 상대성을 띨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인위적 합의를 통해 성문화 된 권리들이라 하더라도 내적 논리가 존재하며, 각자가 이해하는 권리의 내용 또한 각자가 처한 배경에 따라 다르다. 그러한 인식적 한계를 지닌 다수에게 ‘부정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다수는 “90%를 위해 10%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먹이며, 제도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구성원들과 그들의 권리를 탄압할 구실이 생긴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회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견된다. 다수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소수의 정리해고를 정당화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용인하며,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버스조차 마음대로 탈 자유조차 빼앗긴다.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발생했던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파업도 마찬가지다. 도서관 난방 중단과 노동자들의 난방실 점거를 둘러싸고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서로에 대해 이기적이다, 이러한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는다. 어느 사회나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 마련인데 그 상황에서 특정 사람의 권리를 부정할 구실을 주면 언제나 소수자의 권리만 부정당하기 일쑤이다. 이는 권리 논의 자체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한 시대 내에서의 소수자의 권리를 원천 부정하고 큰 폐해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부정'하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용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권리’ 그리고 나아가 ‘자유’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방의 권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처럼 갈등을 벌인다. “봉천동 탈북 모자” 사건처럼 약자가 일방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하기도 한다. 반대로 비교적 대등한 집단끼리 권리 극대화를 놓고 투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과도 있다. 양육수당, 아동수당, 기초생활수급, 실업급여 등은 분배투쟁의 결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권을 누리게 되었다. 한편 호주제 폐지, 군대 내 동성애 무죄 판결, 노인일자리, 여성할당제, 블라인드 채용제 등은 인정투쟁의 결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지위나 신분으로 차별당하지 않게 되었다. 타자의 권리를 보장해 나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 우리는 비록 느릿하나 서서히 자유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