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이 끝나고 비행기 모드를 해제했다. 운동할 때는 동영상을 찍고 그 동영상을 같이 운동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하기 때문에 전화나 카톡 같은 게 오면서 중간에 녹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비행기 모드로 전환해 둔다. 검도를 하면서 전화를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보통 가족들은 이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내가 운동하는 시간대에는 전화를 하지 않거나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겨둔다.
그런데 오늘은 간장이가 전화를 5번이나 하고 가족 톡방과 나와의 개인 톡방에 다급한 메시지를 주우우우욱 올려두었다는 걸 느긋하게 샤워까지 마치고 나와서야 발견했다.
이번 주말에 있을 실기 전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공황증상이 왔는데 그 얘기를 할 가족이 아무도 연락이 안 되어서 너무너무 외롭고 힘들다는 얘기였다. 얼른 전화를 해보니 아이는 집에 들어와 있었는데 여전히 너무 외롭고 힘들다고 했다. 다행히 외숙모(=나의 새언니)가 전화를 받아서 잘 달래주셔서 좀 안정이 되었다고 했다.
이번 주말에 있을 시험이 아이의 세 번째 실기 시험이다. 첫번째 실기를 치른 학교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시제를 내주고 1시간 반동안 1200자 이내의 글을 자유롭게 쓰게 했고 두번째 학교는 여러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에 맞는 소설을 2시간 동안 2000자 이내로 쓰게 했다. 아이는 첫번째 학교의 실기 유형을 더 편해했다. 두번째 학교의 시험을 앞두고는 문제의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고 불평을 했다.
"학교마다 교육의 목표가 다르고 선발하고 싶은 학생상이 다른 거야. 첫번째 학교는 네 안에 있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내,라는 걸 지향하는 거고 두번째 학교는 내가 쓰고 싶은 글 말고 남이 조건을 주고 의뢰하는 글도 잘 쓸 수 있니?를 묻는 거야. 등단하고 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가가 뜯어먹기 좋은 풀밭을 다 뜯어먹고 나서도 계속 매력적인 글을 써낼 수 있는지 시험대 위에 오르는데 그 단계까지 보겠다는 걸로 보여.
작가는 내가 쓰고 싶은 글도 잘 써야 하지만 남이 의뢰하는 글도 잘 써야 한다고 엄마랑 같이 글쓰는 친구 중에 진지하게 책 쓰는 친구가 얘기해 주던데?" 했더니 간장이는 납득했다.
"의뢰받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써볼게요."
그렇게 두 번째 시험도 무사히 치고 왔다. 시험은 아이가 치는 거고 나는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밥 먹을 곳 몇 개 찾아서 아이에게 들이밀면 시험을 마치고 나온 아이가 고르는 음식점에 가서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딸과 나의 데이트인지 시험날인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그러다가 세번째 학교의 실기날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가 좀 까다로운 것이 3시간을 주고 두 개의 글을 쓰게 한다. 하나는 문학창작, 하나는 논술에 가까운 글이다. 게다가 수능최저가 있다. 아이에게 계속 얘기했다.
이 학교가 가장 확률이 높다고. 1차에 7배수를 걸러주는데 첫번째 학교의 경쟁률은 30:1, 두 번째 학교의 경쟁률은 82:1인데 비하면 일단 경쟁률이 7:1밖에 안 되는 거다. 그러니 1차만 통과하면 글 웬만큼 써놓고 수능 최저만 맞추면 따놓은 당상이라고.
그리고 1차를 통과했으니 이제 2차 관문이 남았다. 문제는 간장이는 문창과로 진로를 튼 후 수능시험 공부를 1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기 준비를 하느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만만찮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서 문제지 푸는 공부로 모드 전환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간장이는 우울증을 드러내고 난 후 문제지 푸는 공부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말하곤 했었다는 것.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있다 싶으니 더 잘 하고 싶은데 이 열매는 너무나 뾰족한 가시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가시에 찔려 아파 죽겠는데 엄마는 이제 3주동안 수능 두 과목 전략적으로 빡세게 돌려보자고 그러지, 이 학교의 글쓰기 시제는 본인이 싫어라 하는 주제지, 선생님도 주말에 시험칠 학교 기출 문제에 맞춰 글 쓰자 그러지, 그러다보니 글쓰기 학원에서 과호흡을 비롯한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이의 급한 톡을 받고 답을 올려두었다. 내가 가는 동안 아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좋겠어서.
아이는 다행히 그럭저럭 안정되어 있었다. 이번 토요일 시험을 더이상 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잘하고 싶구나. 잘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힘든 거야. 네가 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고맙네."
"응. 잘하고 싶지. 내가 제일 잘 하고 싶지. 근데 잘 안 돼서 너무 힘들어."
"내일부터 글쓰기 준비 하지마. 수능 공부도 하지마. 그냥 있어. 읽고 싶은 책 읽고, 쓰고 싶은 글 쓰고, 맛있는 거 먹고 뒹굴뒹굴해. 그리고 토요일에는 그냥 시험을 경험하러 가자. 어차피 글 쓰는 사람에게는 경험이 중요한데 이런 경험은 나중에 만들려고 한다고 만들어지지 않잖아. 그냥 그 치기 싫은 시험을 치러 와서 시험을 치면서 내가 뭘 느낄지 그걸 궁금해하면서 시험장에 가자. 어떻게 생각해?"
"그럴까?"
"응. 그러자. 엄마 이제 근처 맛집 검색해두면 되니?"
"그러자."
이번 주말도 간장이랑 데이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