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수시 실기 고사날이 밝았다. 소설 창작뿐만이 아니라 논술 형식의 글을 써야하고 수능최저까지 있는, 하지만 1차를 합격자 수의 7배수로 걸러주기 때문에 문예창작 실기시험을 친 어느 대학보다도 경쟁률이 낮은 대학이다. 조금만 잘 하면 뭔가 될 것 같다는 가능성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해서 공황증상이 와버린 아이에게는 그냥 이 경험을 하러 가자고 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렇게 아이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시험장에 가기만 하면 그래도 열심히 답을 적고 나오지 않을까 하는 노림수도 있었다.
논술 스타일의 글쓰기를 많이 해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시험운이 있다보면 유난히 본인이 평소에 생각해둔 주제나 관심 있는 주제가 딱 문제로 출제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어느 정도는 그날의 운에 기대보려 한 것이다.
아이를 시험장 건물 앞에서 꼭 안아주고 들여보냈다. 9시까지 입실 마감인데 20분 일찍 온데다 시험 시작은 9시 반이다. 아이도 나도 여유가 있다. 처음 와본 대학의 캠퍼스를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다 새로 지은 듯한 건물 로비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서 커피를 싸온 텀블러를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책을 읽었다. 책을 읽어도 읽어도 아직 시험도 시작하지 않았을 시간이다. 혹시라도 아이가 낯선 공간에서 결국은 경쟁자들인 수험생들 사이에서 또 스트레스를 받고 혹시 과호흡이라도 올까봐 걱정이 되어서 힘들면 언제든지 나오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놓고 다시 책을 읽었다.
3시간이라는 아이의 시험시간 동안 나도 다음 주에 있을 독서모임의 책을 읽었다. 시험기간이라 점점 공부하는 사람들로 로비의 좌석이 채워지자 공기 속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져서인지 피로 때문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졸았다 깨었다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번 달부터 평일에는 매일 아침 6시에 한 시간 동안 온라인으로 함께 글을 쓰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6시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온라인 미팅에 들어간다. 카메라를 켜고 신체의 일부분을 비추어야 하는 게 규칙이다.
7시가 되면 아이들을 깨우고 간단한 끼니를 준비해놓는다. 20분이 되면 두 아이를 차에 태워 차례로 학교에 데려다준다. 집에 돌아오면 업무시간이다. 8시간 업무가 끝나면 주 3회는 운동을 하러 간다.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11시가 넘는다. 이 닦고 자자. 하루 끝.
중요한 것이 걸려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상황에서 내가 좀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정착한 매일의 루틴이다.
평일에는 이렇게 살고 주말에는 이 학교 저 학교 실기 시험에 아이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다보니 주말이라고 늦잠을 자지도 못하고 항상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던 탓일까 커피까지 마셔가며 버티려고 했지만 처음 온 남의 학교 로비에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쪼록 너무 흉한 몰골은 아니었길 바라지만 눈을 떠보니 그런 체면을 차릴 새도 없이 아이의 시험 종료 시간이 다가왔다.
아이를 들여보낸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어떤 얼굴을 하고 나올지 몰라 심장이 벌렁거린다.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나올지, 패닉에 빠진 창백한 얼굴로 나타날지. 아무쪼록 전자이길 바라지만 인생이 어디 내 뜻대로 되던가.
시험을 친 교실이 지하여서 지상까지 올라가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딸. 낯빛을 살피니 어느 쪽인지 확실치가 않다. 완전 좌절한 낯빛은 아닌데 그렇다고 완전 해맑지도 않다. 시험은 어땠어? 하고 물으니 역시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소설쓰기부터 물어보니 그닥 어렵지 않게 잘 생각해서 썼다고 한다. 역시나 걱정되는 건 논술형식 글쓰기였다. 시제를 물으니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를 때 성공적이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 무엇을 선택하는 게 나는지 논리적으로 쓰라는 시제가 나왔다고 했다. 아주 일반적이고 쓰기 좋은, 거의 떠먹여주는 시제가 아닌가. 이 정도면 논리적 글쓰기 싫어서 준비 하나도 안 한 사람이라도 뭐라도 비벼볼 수 있는 글감이 아닌가 싶어 내심 반가웠는데 아이는 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자다 깨고 자다 깨어도 끝이 안 나더라고 했다.
순간 기분이 쎄했다. 시험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어째서? 왜 때문에? 창작과 논술 두 개에 세 시간이니 각각 적어도 한 시간 반씩은 적어야 하는데 구상하고 연습지에 써보고 답지에 옮기려면 빠듯할 것 같은데 자도자도 시간이 남아?
딸아이는 문예창작과인데 어중간하게 논술도 잘 쓰고 수능까지 잘 본 사람을 요구하는 이 학교의 전형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바위에 계란을 던지고 나왔다. 그 뜯어 먹기 좋은 풀밭 같은 논술문제에다 딱 한 문장 쓰고 나왔단다.
"진정한 행복이란 뭘까?"
나야말로 묻고 싶다.
"우울증이란 뭘까?"
필기를 최선을 다해 잘 치고 나면 수능을 꼭 잘 쳐야 한다는 부담이 생길까봐 지레 포기 한 건가? 그래도 실패가 두려워 포기를 한 거니? 라는 팩폭은 하지 않기로 한다. 수험생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앞으로 남은 시험들에도 악영향이 미칠 수 있으니 입을 닫는다. 그래, 이미 친 시험을 매우 잘 쳤을지도 모르잖아. 남은 시험들을 잘 칠지도 모르잖아. 과거든 미래든 기대할 곳이 있어 다행인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