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터 팬덤의 시대

by Mickey


디올과 로에베, 그리고 조나단 앤더슨의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대단한 디렉터입니다. 여러 컬렉션에서 보여준 재치와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하지만 최근의 디올 옴므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연결성 없는 디자인 라인과 여성복 아카이브의 무분별한 차용, 그리고 억지스러운 디테일에 부여하는 장황한 서사는 그가 그간 보여줬던 본연의 매력을 흐릿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컬렉션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여전히 높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패션의 팬덤이 '브랜드'에서 '디렉터'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패션이 수십 년간 쌓아온 브랜드의 헤리티지와 로고의 권위에 기댔다면, 현재의 패션 씬은 명백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개인의 서사로 무게중심이 이동했습니다. 소비자들은 이제 브랜드의 역사보다 "이번 시즌에 누가 영입되었는가?" 혹은 "그 디렉터가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소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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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oogle / 디올 옴므 컬렉션


브랜드는 '무대'가 되고, 디렉터는 '장르'가 되다

현대의 디렉터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사람을 넘어, 브랜드라는 거대한 자본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펼치는 총괄 기획자에 가깝습니다. 뎀나(Demna)의 팬들은 발렌시아가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파괴적이고 시니컬한 미학 자체를 소비합니다. 디렉터가 곧 하나의 장르가 된 셈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루해진 브랜드에 즉각적인 '힙(Hip)'을 수혈하고 새로운 세대를 유입시키는 효율적인 마케팅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리스크이기도 합니다. 디렉터의 색깔이 브랜드의 정체성보다 짙어질 때, 브랜드 고유의 영혼은 점차 희미해집니다. 브랜드가 아닌 디렉터로만 소비되는 순간, 브랜드의 본질은 외면받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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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oogle / 뎀나의 컬렉션, (왼)발렌시아가 - (오른)구찌


바이럴 파워, 옷보다 '서사'를 파는 전략

현대의 디렉터들은 이슈를 만드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쇼 구성이나 의외의 협업을 통해 '바이럴(Viral)'이라는 파도를 타고 브랜드의 몸값을 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회의론이 고개를 듭니다. 매 시즌 바뀌는 자극적인 서사 속에서 우리가 정말 '좋은 옷'을 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잘 설계된 '디렉터의 이벤트'에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브랜드의 유산이 사라진 자리를 디렉터의 개인기가 채울 때, 소비자는 일시적인 자극을 얻지만 브랜드는 장기적인 생명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좋은 옷을 만드는 브랜드가 아니라, 서사에 치우친 디렉터의 '드라마'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입니다.



에르메스와 랄프 로렌이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이런 단편 서사의 시대에 에르메스(Hermès)는 훌륭한 귀감이 됩니다. 30년 넘게 남성복을 이끌고 있는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디렉터가 브랜드의 철학에 어떻게 스며들어야 하는지를 가장 우아하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에르메스라는 이름 뒤에서 묵묵히 '간결하고 조용한 럭셔리'를 완성해 왔습니다.

랄프 로렌(Ralph Lauren)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트렌드가 어떻게 변하든 그들은 자신들만의 길을 갑니다. 스트릿과 오버사이즈가 범람할 때도 확고한 스타일을 고집하는 그들의 행보는 역설적으로 가장 명확한 '구매 명분'이 됩니다. 브랜드의 길을 가기 위해 디렉팅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에르메스와 랄프 로렌이 만들어낸 우아한 결과물입니다.

반면 디렉터가 곧 브랜드인 경우, 그 부재는 치명적입니다. 톰 포드(Tom Ford)가 대표적입니다. 20세기 유일하게 탄생한 럭셔리 브랜드라 평가받는 톰 포드는 인물 자체가 브랜드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한 뒤 디렉터가 바뀌었지만, 고객들은 여전히 그가 머물던 시절의 '섹시한 럭셔리'를 그리워합니다. 하이더 아커만이라는 새로운 주인공이 과연 톰 포드라는 강렬한 페르소나를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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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oogle / 랄프로렌 멘즈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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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oogle / (왼)톰포드 시절의 톰포드 - (오른) 하이더 아커만의 톰포드




0.5cm의 직관과 브랜드의 본질

숫자가 설계한 효율적인 기획은 시장에 널려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한 끝의 차이'입니다. 디렉터 팬덤의 시대는 패션을 역동적으로 만들었지만, 우리는 화려한 주연 배우 뒤에 가려진 '브랜드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옷은 디렉터의 이름표가 없어도 그 자체로 빛나야 하며, 브랜드는 디렉터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행을 좇는 맹목적인 팬덤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명확한 브랜드를 찾아내는 경험 하는 것입니다. 바이럴과 단편 서사 그리고 호들갑스러운 숏폼이 지배하는 시대, 당신의 옷장에 남을 '진짜'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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