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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JiYou Jul 31. 2023

학성동 성당 반주자 카타리나

천사를 만나다


초등학교 3학년 지루한 여름 방학을 지나 2학기가 시작되고 어느덧 늦가을이 찾아왔다. 옷장에서 두꺼운 스웨터를 꺼내 입고 평일 오후 5시쯤 엄마와 함께 우리 가족이 다니고 있던 성당으로 갔다. 구역으로 나누어 신자들을 관리하는 성당의 시스템에 따라 우리는 그 성당에 다녔지만, 우리 집에서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곳은 강원도 원주 학성동 성당이었다. 우리 집은 우산동이었다. 혼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고 부모님이랑 함께 갈 때는 자가용을 타고 가야 했다.


거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수녀님이 계셨다. 안젤라 수녀님. 지금 기억으로 적어도 50대 후반의 연세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때 당시 나는 성소모임을 하고 있었고 수녀님은 나를 많이 예뻐하셨다. 내가 수녀님처럼 천사 같은 수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나는 중학생이 되자마자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버렸다. (죄송해요, 안젤라 수녀님!) 아무튼 수녀님과 지난 주일에 이미 약속을 잡고 오디션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야심 차게도 평일 미사 반주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주일 미사 반주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당연히 어린이 미사를 드리러 토요일 오후 3시에 성당에 갔는데, 그때 반주자 언니는 6학년이었다. 그 언니는 넘사벽인 캐논을 거의 매주 쳤다. 미사 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이 퇴장할 때, 발로 밟아 소리를 내는 건반 모양의 페달이 달린 오르간으로 말이다. 진짜 파이프 오르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기로 작동하는 온/오프 버튼이 있었다. 그 언니 덕분에 나는 캐논 악보를 구입했지만 얼마동안은 그냥 보기만 했던 것 같다. 샾(#)이 두 개 붙은 라장조였다. 나는 샾보다 플랫(b)을 선호했던 것 같다.

이미 잘 치는 반주자가 있는 어린이 미사의 반주자 자리는 나의 목표가 아니었다. 나의 관심은 평일 미사 반주자가 되는 것이었다. 수요일이나 금요일 저녁 반주라면 노려볼만했다. 주일 미사시간의 절반 가량되는 짧은 평일 미사는 곡도 4곡 정도만 치면 끝이었다. 신부님이 입장하실 때 한 곡, 헌금 낼 때 한 곡, 성체 모실 때 한 곡, 신부님이 퇴장하실 때 한 곡. 만약 성체 모시고 나서 묵상곡을 따로 고르고 싶다면 한 곡 더 추가해서 최대 5곡만 치면 된다. 반면 주일 미사에 쓰이는 곡은 짤막 짤막한 기도와 기도 응답곡을 전부 합치면 족히 스무 곡은 될 것이다. 역시 부담스럽다.


*


나는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성당에 스테인드 글라스 창가 바로 앞쪽에 놓인 오르간에 앉아 있다. 성당의 습한 재 냄새와 섞여 나무 냄새가 났고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수녀님이 열쇠로 오르간 뚜껑을 열어주셨다. 촤르르륵 소리를 내며 위쪽으로 말려들어간 뚜껑이 걷히자 두 층의 건반과 수많은 버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버튼들은 마치 가지런히 내민 손가락들 같았다. 그 버튼들을 눌러 소리를 조합하는 방식이었는데, 보통 플룻이나 오보에 같은 목관 악기 소리를 여러 개 합친 것 같은 소리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익숙해지자 여러 버튼을 조합해 마음에 드는 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본미사곡들을 칠 때는 무겁고 엄숙한 소리를 골랐고 묵상곡을 칠 때는 여리고 높은음이 나는 소리를 만들어 쳤다. 더 익숙해졌을 때는 입장곡은 엄숙하게, 퇴장곡은 밝고 신나게, 봉헌곡은 소박하게, 묵상곡과 성체 성사곡은 슬프고 서정적이게 만들어 쳤다.

하지만 나는 우선 반주자가 되기 직전의 일을 좀 설명해야만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오디션은 나의 피아노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때부터 나 스스로 피아노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나의 반주자 되기 프로젝트는 결코 순수한 마음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나는 성소 모임의 일원으로서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반주자를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반주자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전에도 말했듯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무릎 위에 놓을 수 있는 사이즈의 야마하 키보드가 전부였다. 그것도 감지덕지였지만 옥타브가 모자랐다. 나에겐 피아노는 아니지만 성당 오르간이 필요했다. 반주자가 되고 나면 거기에서 체르니를 연습할 요량이었다.


수녀님이 들고 있던 반주자용 성가집은 집에 있는 성가집의 세 배는 되는 두께였다. 크기도 공책 만했다. (집에 있는 건 다이어리 만했다.) 악보를 펼치니 역시 악보도 한곡 당 4 성부가 그려져 있었다. (집에 있는 건 한 줄짜리 1 성부였다.) 수녀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나는 내 떨리는 손가락을 미끌거리는 오르간 건반 위에 놓고 생전 처음 보는 4 성부 악보를 더듬더듬 읽어 나갔다.

내가 아직 화성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관한 지식 하나 없이, 즉 스케일이나 장조, 단조에 관한 지식 하나 없이 4 성부의 악보를 무작정 때려 읽는 건 고역이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앞으로 무식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우직한 자세로 연습을 해야 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곡들은 그래도 괜찮았다(고 믿고 싶다.). 가장 윗 성부인 멜로디는 알아서 그냥 움직였다. 그러나 그 아래로 죽 깔린 나머지 세 음들은 제각각 틀린 음을 마음대로 누르며 이게 정말 우리가 아는 그 곡인지 의심케 했다. 수녀님은 아마도 귀가 아프셨겠지만 정말 천사처럼 고요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그게 나를 더 미안하게 만들어 등에서 식은땀이 나게 했지만.

그리고 나의 또 다른 취약점은 바로 타이밍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음표의 길이를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선생님이 새로운 곡을 칠 때마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박자를 세어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곡에 알맞은 박자를 외웠던 것이지 정작 음표 하나의 길이가 갖는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디션을 보면서 나는 내가 앞으로 연습해야 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 산더미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는 반주자가 될 수 없겠구나 하는 것도. 일단 당장은 말이다.


천사 같은 안젤라 수녀님은(그러고 보니 세례명도 안젤라라니.. 정말 앤젤이었잖아..) 말씀하셨다. 내가 반주자가 되기엔 아직 어리다고. 네? 반주자가 되기엔 너무 형편없었던 게 아니라요? 그리고 언니반이 되면 다시 오디션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언니반은 보통 11살, 그러니까 4학년때부터 간주되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의미한다. 나는 당시에 또래들보다 키가 컸고 손가락도 길었지만 아직 동생반의 꼬맹이었던 것이다. 언뜻 수녀님의 말은 사실이었고 위로의 말도 아니었지만, 나에게 용기를 잃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격려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다행이자 큰 자비였다. 분명 그때 나는 좋아하는 수녀님을 실망시켰다는 수치심에 너무 부끄러워 피아노를 그만둘 수도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수녀님은 행여라도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으셨고 돌려 말해 거절함으로써 나에게 다음 기회를 주셨다.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주신 것이다. 나에겐 아직 희망찬 미래가 있다. 10살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수녀님은 또 다른 선물을 하나 더 주셨다.


“학교 끝나면 성당에 와서 오르간 연습할래? 한 5시부터 6시까지 평일 미사 시작하기 전까지만 끝내면 될 거야. ”


이날부터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섯 시가 되면 성당엘 갔다. 혼자 버스를 타고 신나게 달리며 요술 공주 샐리가 그려진 꽃분홍색 가방을 꼭 안고. 언젠가 이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버스 터미널까지 찾으러 갔던 기억도 난다. 성당에 매일 갔던 경험이 없었다면 10살의 나이에 집 근처에서만 놀다 자립심이나 모험심이 없는 아이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때의 경험을 1석 2조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든, 하루도 빠짐없이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늘 커다란 예수님과 성모님 상이 두 팔 벌려 나를 반겨 주었다. 안젤라 수녀님은 그때마다 오르간을 열어 주셨고, 어느 날부터는 아예 열쇠를 주셨다. 습한 재 냄새와 나무 냄새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 어딘가에서 향을 피우도록 각인되어 갔고, 미끌거리고 가벼운 오르간 건반은 나의 흐물거리는 손가락과 궁합이 잘 맞아 갔다. 몇 개월 뒤인 4학년 1학기. 난 언니반이 되었고 수요일 저녁 미사 반주를 하며 ‘라이브 연주’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4 성부의 합창 반주 악보는 점점 익숙해져, 처음 보는 곡도 너무 조표가 많지만 않다면 틀린 음을 교묘하게 비껴가며 능숙하게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주욱 메인 반주자로 봉사를 했다. 중간에 또 여러 번 이사를 다녀 학성동 성당은 떠나게 되었지만, 새로운 성당에 가서도 오디션을 자청해서 보고 매번 메인 반주자가 되었다. 이때 초견이 많이 늘었고,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연주법을 배웠고, 피아노가 없는 집에서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피아노를 잊지 않고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평생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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