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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JiYou Aug 15. 2023

문예부의 최 롸커(rocker)

문과에서 예체능과로

 나는 어느덧 고 2가 되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가? 그건 아니었지만 모범생이긴 했다. 다만 수학이 너무 어려워 점수를 다 깎아 먹었다. 수학은 시험만 봤다 하면 50점을 넘지 못했다. 무려 15점을 맞은 기억도 있다. (빵점이 아닌 게 어딘가.) 하지만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나는 수학이 재미있었다. 어떤 수학 선생님의 설명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세상의 이치가 수학과 맞닿아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수학 문제는 못 풀지만 나는 늘 수학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나에게 맞는 설명만 들을 수 있다면 수학 문제도 잘 풀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숫자풀이나 계산만이 수학의 전부는 아닐 거라고 다소 무식한 판단을 내리고는 낮은 수학점수에도 안심했다. 아무튼 수학 교과서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자연의 이치인 수학을 나는 사랑했다. 언젠가 잘하게 될 거라는 자신감도 늘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나중에 화성학을 배우게 되었을 때 나는 역시 수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예 창작 동아리였던 나는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다기보다 어렸을 때 동시 짓는 걸 좋아했고, 위인전 테이프를 듣는 걸 좋아했고, 과학 만화책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책과 글에 관심은 있었는데 그렇다고 글을 잘 썼다거나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문예부를 지원한 건 어떤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인천 부평 여고의 문예 창작 동아리 “띠앗”에는 ‘띠앗 글씨체’라고 하는 고유 서체가 있었다. 그 서체는 아무나 따라 쓸 수 없었다. 반드시 ‘띠앗인’(문예부 아이들은 자기들을 이렇게 칭했다.)들만 써야 했다. 띠앗체는 우아한 굴곡을 가진 매력적인 서체였고 고등학교 소녀들은 그것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했다. 다이어리에, 노트에, 교과서의 겉표지에.. 하지만 매주 글을 쓰거나 독서 토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18세 소녀들은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그쪽으로 대학을 갈 게 아니라면 그런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동아리는 비추에 속했다. 그보다는 스트레스라도 풀 수 있는 춤 동아리나, 동아리 시간에도 대놓고 쌓인 공부를 할 수 있는 서예부 등을 선택했다. 공부도 벅찬데 매주 글을 쓰다니.. 아니 될 말이었다. 거기다 아무나 띠앗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학년에 최대 4명만 뽑았고,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산문을 써서 내야 했던 거 같다. 이런 어려움이 있음에도 나에게 정말 멋져 보였던 건, 시를 지어 그 전매특허인(어쨌든 우리 학교 내에서는) 띠앗 글씨체로 커다란 캔버스에 적고 축제가 되면 전시를 했다는 거다. 나는 그 글씨체를 사용하는 특권을 얻기 위해 글을 쓰겠다는 용기를 냈고 운 좋게 경쟁자들을 제치고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늘 띠앗체를 쓸 수 있게 모나미 붓펜을 들고 다녔다. 그 글씨체는 붓으로 썼을 때 진가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피아노에 관련되거나 음악에 관련된 동아리를 들지 않았느냐고?

 그건 내가 물론 성당에서는 알아주는 반주자가 되었지만 까놓고 보면 전공을 하는 부류에는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음악 관련 동아리는 보통 그쪽 전공으로 입시를 앞둔 아이들이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지금도 계속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등학생이라고 하더라도 나름 출중한 실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주눅이 들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한다. 그래도 사실은 고등학교 때 롸커(rocker)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는 걸 밝힌다. 나는 음치이면서도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수학을 못해도 수학을 좋아했던 것처럼. 그렇지만 밴드부에 들어갈 실력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고 밴드부 보컬에 그다지 동기 부여가 되지도 않았다. 내 주위에 노래 깨나한다는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롹 스피릿~을 외치며 샤우팅을 하는 것으로 만족되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밴드부의 키보드 포지션도 그때 나에게는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클래식 피아노를 좋아해서 그랬나? 어쨌든 자신도 없었고, 그 당시 나는 노래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고를 친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였을까? 불화로 인한 집안 문제로 쌓인 불만의 표출이었을까?

 나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샤우팅을 해대며 노래를 질러댔다. 부른 게 아니었다. 질렀다. 내 안에 있는 걸 소리로 다 끄집어내어 쏟아냈다. 그게 나에겐 노래 연습이었다. 이불속에서 하도 소리를 질러서 연습을 하고 나면 코도 맹맹해졌고 목도 다 쉬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나는 정말 노래가 좋았다. 지금 밝히자니 조금 오글거리지만 김종서나 김경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한민국 여자 롸커.. 그때부터 내 별명은 최 롸커가 되었다. 문예부 최 Rocker!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때 머리 풀어헤치고 헤드뱅잉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자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이야기도 이제 점점 피아노를 향해 갈 것이다. 정말이다. 믿어 주길 바란다. 나는 피아노에 관한 글을 쓰고 있고 오늘은 오프닝이 좀 길 뿐이다. 아니, 이 오프닝이 결국 본문이 되더라도 조금만 더 넓은 마음으로 끝까지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이건 나중에 진짜 피아노 이야기로 이어지는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피아노가 없었다는 것은 내가 하도 언급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이제 더 이상 성당에 매일 가서 연습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매주 반주는 하고 있었다. 그게 나의 피아노 치기, 아니 건반 치기의 전부였다. 그런데 노래 부르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나름 음악적 갈증은 해소되고 있었다. 성당에 매일 가는 대신 노래방에 매일 가서 노래 연습을 하고 그걸 녹음한 테이프를 받아서 집에서 듣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2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문예부 친구 한 명이 가을에 인천 청소년 가요제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더러 나가보란다. 그 친구는 이미 내 이름으로 원서를 접수했고 나는 얼떨결에 오디션에 나갔다가 덜컥 붙어버렸다. 김경호 노래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걸 부른 것 같고 제목은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선 야심 차게 2차 오디션에서는 자작곡으로 응시하겠다고 했다. 곡은 써둔 게 있었냐고? 그럴 리가. 대신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사와 모티브가 되는 강력한 멜로디가 있었다. 반복되는 멜로디가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곡이었다. (지금도 부를 수 있다. 음은 아주 정확히 기억나고, 가사는 조금 잊어버렸다.) 나는 자작곡이 아니면 평범한 내 노래 실력에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2차 오디션이 열렸고 내 자작곡은 인기 폭발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합격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우쭐함도 잠시, 문제가 생겼다. 3차 오디션을 위해 악보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무반주였다.) 이럴 수가. 악보? 그래, 악보가 당연히 필요하겠지. 그땐 엠알이 있었던 시대가 아니니까. 반주 밴드가 대기해 있거나 노래방 반주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틀던 시대였지. 가만.. 생각해 보니 엠알 준비하라고 했으면 어쩔뻔했나..? 악보라 천만다행이었네.


 나는 피아노도 없는 집에서 리코더를 길잡이 삼아 열심히 멜로디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게 나의 첫 작곡이었고 첫 악보 작업이었다. 팬시 문구점에서 파는 모닝글로리였나 에버그린이었나 하는 상표의 음악 공책에 적었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음표가 그려진 한 장의 악보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머릿속에 영상으로 기억되어 있다. 약간 베이지빛이 도는 오선 노트에 샤프로 또박또박 적은 어설픈 멜로디와 가사. 박자를 손가락으로 꼼꼼하게 세어 가며 여러 번 확인하고 나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악보를 만들어 제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허술하긴 해도 순수했던 것 같다. 너무 순수해서 문제였지만.

 3차 오디션과 본선에서 반주를 맡아 줄 밴드는 내 악보를 보자마자 경악했다.


”코드는? “


 네? 코드요? 그게.. 뭔데요? 암호 말씀인가요? 그런 거 없는데.. 나는 무척 당황했다. 3차 오디션은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그때 악보를 가만히 보고 있던 기타리스트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에이 마이너네. “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구원자 같은 아저씨 덕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얼마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띵까띵까 몇 소절 맞춰보더니 나더러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진한 록기타 소리가 덜컹대며 먼저 달렸고, 드럼도 뒤따라 서서히 요동치고 있었다. 이어서 베이스 기타 소리가 묵직한 진동을 내뿜으며 기타를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고 순간 무대 조명이 켜졌다. 나는 어느새 본선 무대에 서 있고, 내 노래는 커다란 함성소리와 함께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마약 보다 더 중독성 있다는 대중의 함성이 내 귓가에 아직도 들린다. 그날 인천 예술 회관의 관중석은 꽉 차 있었다. 나의 첫 무대는 너무 컸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마음껏 즐겼고 지금도 자랑스럽다. 마이크를 잡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가 머리와 한 방향으로 꺾고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세차게 세 번 흔드는 헤드뱅잉을 했던 18살의 나. 나는 그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 날, 학교는 난리가 났다. 문예부 친구들 몇 명과 반 친구 몇 명을 데리고 갔을 뿐이었는데 내가 가요제에서 입상했다는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졌다. 아침 조회 시간에 느닷없이 불려 나가 ‘어둠이 다가온다’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전교생 앞에서 무반주로 불러야 했다. 밴드가 없어서 헤드뱅잉을 할 맛은 안 났지만 나름 즐겼던 것 같다. 음악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가서 맹랑하다는 훈계도 들었다. 어쩌면 자기와 상의 한 번을 안 하고 그런 대회를 혼자 준비해서 나갈 수 있느냐고, 자기가 교장 선생님께 얼마나 면이 안 섰는지 알기나 하냐고. 하여튼 요즘 것들은 이렇게 맹랑하다니까.라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괜찮았다. 음악 선생님이 나의 음악적 재능을 못 알아본 건 어느 정도 내 탓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너무도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음악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부터 피아노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러분은 어쩌면 실망하실 수도 있다. 오늘 피아노 이야기는 정말 짧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프닝으로 썼던 이야기가 우려했던 대로 결국은 중심이 되고 이제 곧 이 글은 마무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 3이 되어서도 학교에서 나는 최 롸커로 통했다. 이미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요제에 입상 이후로 건수만 생기면 앞으로 나가 노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운동회, 축제 때도 물론이다. 심지어 인천 대학교 축제에 초대되어 대학 밴드 ‘파이오니아’와 협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문예부 친구(나를 가요제로 내보낸 그 친구)가 라디오 프로그램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에 내 사연을 적은 엽서를 보내고 뽑혀서 출연하기도 했다. 무려 김종서 앞에서 노래를 했다. 비록 전화 연결이었지만. 녹음 방송이라 새벽 1시에 김경호의 ‘나의 사랑 천상에서도’를 불렀다… 본 방송 날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에서 들려오던 내 목소리란.. 어딘가 벅차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인상 깊은 경험이자 값진 추억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듯 그때도 어딘가 겉도는 성향이 있었다. 밴드부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노래를 작곡하지도 않았다. 축제 때 기획사에서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회사에 가보고는 좀 깨름찍해서 거절했다. 가요제에 입상하고 보니 대중 가수는 나의 길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조금 독특한 편이었다. 특히 목소리가 다른 여자애들 같지 않았다. 그때 막 아이돌들이 생겨나던 때였다. SES나 핑클 같은.. 내가 아이돌이라.. 음… 글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음악 선생님도 서서히 나에게 시들해졌다. 고 3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났는데도 이렇다 할 다른 음악 활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갑자기 쏟아진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매번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나서 조금 멋쩍어지기도 했다. 대신 나의 마음속에는 점점 또 다른 욕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욕망했던 그것. 바로 피아노였다.


 나는 고3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난 4월. 과를 바꾸었다. 문과에서 예체능과로.

 입시를 7개월 앞두고 전공을 바꾼다는 것은 내가 최 롸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물론이고 다른 반 아이들과 선생님들까지 모두 놀라 자빠졌다. 잉? 지금 전공을 바꿔? 그것도 피아노로? 노래가 아니라?

 그 당시 전공 바꾸는 것을 허락해 주시고 어려운 결정을 지지해 준 나의 고 3 담임 선생님, 두고두고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그리고 문예부 친구 조은영.. 그때 너의 추진력이란. 네 덕분에 나는 평생 음악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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