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롱 Mar 20. 2021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작년부터 하혈이 잦아졌다. 생리통도 심해지고, 복부에 전해지는 고통도 강해져 병원을 찾았다. 이리저리 검진을 받고, 초음파도 진행해 봤으나 돌아오는 선생님의 답은 간단했다.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또, 최근엔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밥을 먹으면 먹는 대로 속이 더부룩하고, 굶으면 굶는 대로 몸 어딘가가 아팠다. (어딘가가 아팠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가끔 끼니 좀 걸렀다고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풀려 중력을 무시한 채 혼자 바람에 펄럭거릴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쌍하게도 연차는 내지 못하고, 점심시간을 틈 타 병원에 방문했더니 돌아오는 답은 역시나 간결했다.



"스트레스가 제일 큰 문제예요.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는 말, 아시죠?"



알지. 알다 마다.

근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21세기 한국에서, 그저 그런 중소기업에 다니는 말단 사원이 하루 라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돈 버는 법, 그게 가능하긴 합니까?





| 어림도 없지.





몸 상태가 절정에 다다른 건, 근래다. 근데 이게 몸 상태에 문제가 생긴 건지, 정신 상태에 문제가 생긴 건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출근을 하는데, 갑작스레 누군가 달려와 내 뒷목에 칼을 꽂아 넣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왔다. 당시 서 있던 곳은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골목 사이로 누군가 활을 쏴서 내 눈알을 터트리는 상상까지 믹스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가 서 있는 곳 옆 건물 옥상에서 누군가 벽돌을 던져 머리가 터지는 결말까지 추가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누군가'의 누군가도 없던 골목에서 어떻게 그런 잔인한 상상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뭐, 지금이야 정말 INFP 다운 망상이군, 하겠지만 (100번을 검사해도 이 유형만 나온다. 젠장.) 그때는 정말 패닉 상태였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차가운 시멘트 벽에 몸을 기대고서야 서서히 진정을 되찾아갔다.



'내 뒤엔 벽 말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칼 들고 달려오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천 년 같던 몇 분이 흐르고서야 몸은, 또는 정신은 정상 궤도를 되찾았다. 그때 딱 한 번만 그랬다면 히어로 무비를 좋아하는 내가 쓸데없이 과몰입을 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끔찍한 망상들은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로변에서 예고도 없이 나를 덮쳤다.


뒤 쪽에서 큰 소음이 들려올 때, 사람이 많은 곳을 혼자 거닐 때, 사람이 없는 곳을 혼자 거닐 때 등. 증상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 상태가 대체 어느 수준까지 피폐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너, 정신과 좀 가 봐.





문제를 알아차린 건 나의 절친한 친구 덕분이었다. 퇴근 후 터덜 터덜 집으로 돌아가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냐는 안부 겸, 서로 일하는 회사 욕도 좀 할 겸, 친구의 연애 고민도 들어줄 겸. 이 시국 시즌이라 비대면으로 쌓아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막 풀어내던 찰나였다.


근데 나 요즘 좀 예민한 거 같아. 자꾸 누가 날 죽이려고 하는 거 같아, 웃기지 않냐? 묻는 말에 친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다른 증상은 없어? 제법 심각해진 목소리에 그간 겪었던 망상의 일부분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괜히 머쓱해 나 과대망상 같은 게 좀 생겼나 봐. 하며 웃었다.


친구는 여전히 말을 아끼다, 한숨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너, 정신과 좀 가 봐.



(결론을 말하자면 아직 정신과는 가지 못했다. 겨울 내 멈춰있던 생명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봄에는 우울증 환자들이 늘어난다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약부터가 험난한 여정이었다. 아직 내 차례가 오려면 한참이나 남았단다. 그 사이 내 망상이 심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친구는 진심이었다. 너 좀 이상한 거 같다고. 흔히 말하는 공황장애나 불안장애가 아니냐고. (아직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해 예상일 뿐이다.)


나는 하하, 그렇게 거창한 병이 나한테 올 리가 없을 텐데? 내가 뭐라고. 내가 하는 일이 뭐라고. 답하고 집으로 돌아와 증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나 진짜로 정신과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바로, 나는 불안증 같기도 했고, 공황 장애 같기도 했고, 번아웃 증세 같기도 했다. 하나같이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큰 고민에 빠졌다. 내 스트레스의 주된 원인은 회사이지만, 회사를 그만 두면 나는 뭘 해  먹고살지? 다시 취직이 가능해? 내가? 나이도 나이인데 다시 경제 활동을 못하면 어떡하지? 그렇지만 이러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져 죽는 게 아닐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불분명한 지수라지만 언제나, 늘 빨간 불에 가 있는 나의 스트레스 지수. 홍(紅)익인간의 정신을 본받았던가.)





|네 잘못이 아니어도 사과하는 자리, 네가 앉은 그 자리.





친구는 점점 더 우울의 늪으로 가라앉는 내게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이 뭐냐니? 네가 잘못하지도 않고 사과를 하고, 고객에게 빌어야 하는 자리인데. 그게 어떻게 아무것도 아냐?


듣고 보니 그렇다. 나는 회사와 고객의 중간 다리 일 뿐이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회사 또는 회사의 개발자들 책임이다. 이벤트에 문제가 있다면 기획이나 영업팀 문제고. 내가 잘못한 건 그 사람들을 대신해 화가 난 고객들과 통화를 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엔 내 잘못이 생각나지 않았다.


화가 난 고객들은 내가 받은 고통, 또는 피해에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나를 다그친다. 그에 대한 답 역시 내가 내릴 수 없다. 직접적인 잘못을 한 이들에게 눈치를 보며 묻고, 또 눈치를 보고 수그리며 고객에게 전달하는 것 외엔.


쓰고 나니 나, 정말 불쌍한 자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구나.


아무 잘못은 하지 않았으나 양 쪽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내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타노스가 튕긴 핑거스냅이라면 덜 억울할 텐데. 고작 몇 푼 벌어보겠다고 나는 내 모든 걸 바스라 트리고 있는 거다. (그렇지만 고작 몇 푼이라도 감사합니다. 예, 먹고살아야죠.)


죄송합니다. 다시 알아보고 전화드리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내용 깊이 새겨 다시는 이런 불편함 겪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정은 양가 교환의 산물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짝사랑 조차 상대방의 친절에서 시작하는데. 나는 갑자기 쳐들어온 누군가의 화를 받고 굽신거리며 영문도 모른 채 빌고 있었다. 그래. 돈 벌려고 내가 선택한 자리지만, 이런 자리는 왜 생겨난 거야? 잘못한 사람이 전화받아 해결하면 안 되는 거야? 싼 노동 값에 욕받이를 세워둔 건가? 내가 그 욕받이고?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점점 더 능력도 없어 이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혐오하게 되고, 꾸짖고, 미워하게 된다. 밤새 잠을 설치다 출근을 하기도 했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왜 구직 사이트에 콜 센터와, 콜 업무 관련 직종은 넘쳐나는지. 왜 공을 들여 헤드 헌터들이 직접 콜 센터 지원자를 찾아다니는지.


나는 너무나도 큰 짐을 얻고, 그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에 있는 모든 진상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