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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기 혹은 삶 쓰기

퍼온 글- 정지우 작가

by 대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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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 고민이 작가의 일이니까. 그래도 그 일을 이렇게 하고 있노라고 다 쏟기는 어렵다. 고민 끝에 글쓰기에 대해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쉽게 공유하기는 망설여진다. 내가 쓴 글은 과연 그런가. 내 잣대로 쟀을 때 부족함이 없는가 하는 염려 때문이다. 작가가 자기 마음에 쏙 드는 글을 쓰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 아침에 이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님 자신 있으신가?'

잘 살아 잘 쓸 자신. 이후에 편집자와 동료 작가에게 행실로 탓 듣지 않을 자신. 그러다 머리를 흔들었다. 삐딱하게 책잡지 말자. 작가의 속뜻을 글의 첫인상만으로 쉽게 재단하지 말자. 과연 그런 권한이 내게 있을까. 나는 몇 분만에 읽지만 작가가 이 글을 몇 분만에 쓰진 않았을 텐데. 이것이 맞구나, 저것은 틀렸구나, 이렇게 해야겠다 하며 조심히 적어 내려가는 그 마음을 먼저 보자.


흔히 삶과 일치하는 글과 문장을 쓰자고 하지만 삶에서 완전히 유리된 문장을 쓰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과거의 유산이든 미래의 바람이든 살면서 그런 생각을 먼저 해야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과 삶이 다른 건 사람의 '중심(3. 확고한 주관이나 줏대)'이 쉽게 옮겨지는 탓이 아닐까. 허리 곧추 세워 정제된 문장을 적었지만, 삐딱하게 앉아 대충 말해버리는 것이다. 내 삶의 중심을 잘 잡고 가는 건 늘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큼 어려우니까.


한편으로, 작가는 글대로 사는데 독자가 마음대로 선 그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주 옛날에, 기형도 시인의 시집 읽으며 고개 갸웃거리다 감탄하다 옮겨 적다 그랬다. 스토커 기질이 있는지 할 일이 별로 없어 그랬는지 전집을 사서 읽고 관련 기사도 찾아 읽었다. 점점 시인의 삶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작품 달리 그에 대해 사람들은 유쾌하고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회고했다. 똑똑한 사람의 멋진 문장일 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고개를 들었고, 그러고 보니 경험보다 사유에서 뽑아낸 안일한 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데도, 내가 우울 속에서 읽은 시의 작가가 명랑하게 웃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갔다. 그때 내가 어려서 사고가 단편적이었던 탓이겠지. 모든 사람은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고 즐겁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며 밥도 먹고 화장실에도 가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래도 참 잘 썼다. 읽는 사람 마음 흔들리게 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 그 시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얼마 전 페북에서 기형도의 지인이 쓴 글을 우연히 봤다. 알던 사람도 아닌데 어떤 알고리즘 탓인지 그 피드가 내 눈앞에 있었다. 개인적인 글이었다. 기형도 시인이 어느 정도 가난했는지는 그 집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아프게 읽은 어떤 시의 배경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머리가 띵했다. 가난이 아니었다면, 가난이 불러온 사건들이 없었다면 밝은 성격의 그는 얼마나 더 밝고 힘찬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그의 짧은 생이 더욱 안타까웠다. 나는 그가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시를 그렇게나 여러 번 읽었던 것이다.


쉽게 쓰지 않고, 쉽게 살지 않고, 쉽게 읽지 않는 일, 삶이 얼마나 복잡한 구조인지 배워 가는 일. 이 일들을 지금껏 내가 배운 것만으로는 해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해를 거듭할수록 강하게 든다. 공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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