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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01. 2023

<버닝>, 현 세대의 실체 없는 무력감을 탐구하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순과 예술의 역할

   

   영화 <버닝>에는 종수(유아인),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 3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종수는 물류 배달 아르바이트 도중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해미를 우연히 마주하게 되고, 그녀 역시 판촉 행사 아르바이트 중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 어느 날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의 자취방에 들러 종종 고양이를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는데, 종수는 고양이 밥을 꾸준히 챙겨주지만 한 번도 실제로 만나지는 못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를 들뜬 마음으로 맞이한 종수 앞에 그녀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사귄 친구라며 ‘벤’과 함께 나타나고, 그는 특별히 직업도 없이 부유하게 사는 정체불명의 남자다. 셋이 함께 어울리면서도 미심쩍게 생각하던 종수에게 어느 날 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를 털어놓고, 곧바로 해미가 실종되면서 종수는 벤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힌다.

   <버닝>은 모호하다. 벤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해미가 키우는 고양이나 해미의 추억 속 우물은 실재하는 것인지, 해미는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등, 다양한 요소가 불분명하게 제시되며 끝내 해결되지 않아 모호한 불쾌감 또는 서늘함을 남긴다. 이러한 감정은 이야기 전반에 걸쳐 종수가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특히나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종수의 시점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점이다.



   종수가 느끼는 무력감의 근원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먼저 벤과 해미, 종수의 계급적 차이는 높낮이를 통해서 잘 표현되고 있다. 벤의 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신축 빌딩으로 넓고 깨끗한 공간이다. 반면 종수는 경기도 변두리에 위치한 오래된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해미의 허름한 원룸에 들를 때마다 홀로 자위를 하는데 매번 유일한 창 밖으로 보이는 저 멀리의 남산타워와 대비되어 무력감이 극대화된다. 해미가 사라진 뒤 벤의 뒤를 좇던 종수는 언덕에서 납작 엎드려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일어서기도 하는데, 비탈길 위에 서있는 종수는 여전히 벤보다 아래에 있다.

   셋은 자주 어울리며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하고, 모두가 상류층인  친구들의 모임에 초대받기도 한다. 종수는 처음부터 경제적 지위가 다른 벤이  해미와 자신을 곁에 두는지 의뭉스럽게 생각하는데,  친구들이 모인 모임에서 극대화된 위화감을 경험한다. 상호작용 측면에서 벤과  친구들은 친절한 태도로 해미를 대하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마치 구경거리 보듯 일회성으로 소비하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논의를 빌어, 구조적 불평등이 상호작용 관계로 침투하여 평등한 관계 설정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해미는 이에 대한 아무런 감각 없이 아프리카에서의 무용담을 해맑게 설명하고(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는 ‘리틀 헝거 존재의 의미를 갈망하는 ‘그레이트 헝거 대한 이야기를 설명한다), 리틀 헝거  그레이트 헝거 각각의 춤을 벌떡 일어나 신나게  보인다. 종수가 굴욕감과 더불어 무엇을 향해 분노해야 할지   없어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지루한  하품을 하는 벤과 눈이 마주치고, 벤은 눈을 찡긋하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대물림한 각자의 가족과 인물들이 형성하고 있는 관계 역시 평등하지 않다. 이창동 감독의 초기작인 <초록물고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가족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데, 대부분 가족들이 모이면 그 속에서 어떤 갈등이 발생하지만 종국에는 회복하는 모습을 그리며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러나 버닝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해미와 종수는 가족에게 안정감을 얻거나 뿌리내릴 수 없는 개인들로 묘사되는데, 종수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가출한 상처가 있으며 폭력적인 성향의 아버지는 이웃과의 심한 다툼으로 현재 재판을 치르고 있다. 해미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도태된 개인들에게는 더이상 가족도 안정적인 울타리가 아닌 것이다. 혈연으로부터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벤 뿐으로, 그는 엄마와 통화할 때 DNA가 우월하다는 농담을 하고, 가족들과 용산 참사 전시 그림을 배경으로 여유로운 식사를 하며, 가족들 간 누가 누구와 닮았는지를 주제로 대화한다.



   종합하면, 인물들이 경험하는 무력감의 근원은 관계(소통)의 실패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무력감은 삶의 무의미성을 경험하게 만든다. 벤은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해 그저 ‘재미’를 쫓아 사는 인물로 묘사된다. 종수씨는 너무 진지하다며, 진지하면 재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종수와 벤의 관계는 뭔가 특별한데, 둘은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은근히 서로를 닮고 싶어하는 것도 같다. 해미와 있을 때 종수를 부르는 것도 벤이고, 심지어 그는 종수가 좋아한다는 작가의 책을 찾아 읽기도 한다. 종수 역시 벤을 내심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다. 종수는 해미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벤에게 고백하고, 별말 없이 듣던 벤도 종수에게 자신 역시 비밀이 있다며, 시골에 버려져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종수는 비닐하우스가 메타포인지 아닌지 헷갈려 한다.

   반면에 해미는 삶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갈망하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의 해미는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말하며, 그런 자신을 구해준 것이 종수라고 말한다. 해미는 위를 바라보며 구원을 갈구했고 그 구원이 된 대상은 종수다. 여전히 그녀는 그가 자신의 삶의 구원이 되어주길 바란다. 종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자신의 존재적인 갈망을 이해해줄 거라 믿은 것이다.

   해미는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춤을 추는 것이 실은 하기 싫을 텐데 그 자리에서는 자신에게 잘 맞는다며 괜찮다고 애써 말하지만, 이후 종수에게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은 진실한 마음을 꺼내 보인다. 해미는 벤 친구들이 모여 있는 모임에서와는 달리 종수 앞에서는 리틀 헝거의 춤을 생략하고 곧바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며, 자유롭게 자신의 옷을 벗어버린다.

   그러나 아마 종수는 그녀를 경멸적인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고, 웃으며 춤추던 해미의 얼굴은 종수가 있던 쪽을 본 뒤에 일그러지며 점점 슬프게 변한다.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옷을 벗는 행동은 창녀나 하는 것이라며 차갑게 쐐기를 박는다. 해당 사건 이후 해미가 아무런 흔적 없이 실종되고, 종수는 벤의 취미나 여러 정황을 토대로 벤이 해미를 살해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그의 뒤를 추적한다.



   결말 부분에 이르면 종수는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려놓고 갑작스레 나타나 돈을 빌려달라는 엄마를 위해 소를 팔아 빚을 대신 갚고, 아버지의 재판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는 등 증오했던 혈연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정리한 뒤 미뤄왔던 소설쓰기를 시작한다.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며 아직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전반부와 달리, 이제는 세상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는 결론에 이른 종수는 그를 불러내 칼로 찔러 살해하고 자신의 모든 옷을 벗어 시신과 함께 태워버린다. 해당 부분 역시 관객에게 혼란을 주는 요소 중 하나인데, 실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종수가 쓴 소설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계의 실패로 인해 괴로워하고 자신의 삶이 처한 진실을 마주하기를 미루며 무력감에 빠져있던 종수가, 소설쓰기(예술)를 통해 현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굴욕에 대해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또한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편(해미)에 서게 됨으로써, 자신의 분노와 무력감을 극복해 나가는 성장 서사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겉모습은 우아하다. 우리가 구조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 서로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무제한의 자유 속 나의 빈곤은 나의 무능 탓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 관계 속으로도 침투하여 진정한 관계 맺음을 어렵게 만들었고, 실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순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개개인은 뚜렷한 원인 없이 무력하고 서로로부터 더욱 고립되어간다.

   이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은, "(과거 세대에게는) 자신의 현실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대상이 분명했다면 지금은 무엇 때문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런 무력감과 내재된 분노 같은 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저희 영화는 젊은이들의 상태와 이 세상의 미스터리를 마주하는 그런 영화라 볼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버닝>은 곧 종수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젊은 예술가에게 헌정하는 서사라고 생각한다. 명료하고 단순한 쾌락 대신 모호해 보이는 삶의 의미를 쫓아야 하며, 예술은 삶의 의미를 긍정하는 믿음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당장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의 진실과 대면하고 현 세대만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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