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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I Jun 12. 2021

영어, 막상 닥치면 하게 되는 것

눈치의 힘

 정말 많은 대학생들이 해외로 교환학기를 가거나 어학연수를 해서 특별한 스펙이라고 할 수 없어졌다. 내 대학 동기들과 고등학교 친구들의 대부분이 해외 거주 경험이 있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해외 경험은 이제 흔하디 흔한 스펙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끼리는 안다. 해외에서 살아봤다고 해서 다 그 나라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수업을 따라가는 것보다 더 힘든 건, 한국 대학과 전혀 다른 아날로그 방식의 수강신청과 성적 이의신청 등의 서류 작업을 해치우는 일이었다. 영어나 전공 언어면 다행이지만 제3의 언어가 가득한 서류라면 파파고만 하루 종일 붙잡고 있게 된다. 내내 마음고생하며 처리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것만 어찌어찌 해결하면 이제 눈치껏 수업에 참여하고, 눈치껏 과제를 하면 된다. 성적을 환산하는 방법만 달랐지, 외국 대학도 점수는 교수님 재량인 영역이 컸다. 짧디 짧은 영어로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좋게 보셨는지 과제 수준이 처참한데도 A+를 주신 교수님도 계셨다.



 교환학기를 끝내고 학교에 복학했더니 "너 이제 영어 잘하겠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대답은 "아냐 못해, 응 잘해"도 아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다 하게 돼있어"였다. 내가 선택해서 시간과 돈을 들여갔는데 뭐가 됐든 해야 하지 않겠나.

학기를 시작할 때 스페인 선생님께서 유난히 나에게 발표를 많이 시키셨다. 대답을 잘 못하면 다시 물어보시고, 또 물으셨다. 나름 씩씩하고 센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페인에서는 그렇게 작게 말하면 안 돼. 큰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 해야 해"라는 말을 들었다. 이 왜소하고 어린 동양 여자애가 스페인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동양인 거주자가 적은 스페인의 작은 도시에서 6개월 가까이 생활하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내 영어 발음이 어떻든, 많은 단어를 알던 모르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할 줄 아는 것이 중요했다. 학교 내에서는 그렇다 쳐도 혼자 배낭여행을 하면서는 인종차별에 맞서야 했기 때문에 영어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최근까지 살았던 영국도 그렇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지만 집 앞 슈퍼나 부동산만 가도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 직원들이 많은데, 그렇다고 자신의 영어 실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이라고 처음 영국에 왔을 때부터 영어로 말하는 게 쉬웠을까? 하지만 나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쳤고, 모국어가 아니니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생겼던 12월


 리젠트 스트릿이라는 런던의 중심가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 거리가 있다. 그곳에 내 일터가 있었고, 정말 바쁜 날에는 보스가 흘리듯 말하는 내용도 알아듣고 빠릿빠릿 움직여야 했다. 누가 나에게 짜증을 내면 그 짜증의 이유가 뭔지 눈치껏 알아내는 것도 내 일이었다. 영국인, 호주인, 미국인 등 영어가 모국어인 동료들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영어 실력이 한 단계 더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나는 저 사람들처럼 남을 무시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기도 했고)


'유튜브 보고 배운 문장이 이런 상황에서 실제로 쓰이는구나!', '토익 공부할 때 달달 외웠던 전치사인데, 다음엔 틀리지 않게 말해야지!'를 통해 영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거쳐갔다. 어제는 내가 사용할 줄 몰랐던 숙어가 오늘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올 때의 희열을 몸소 체험했다.


영어를 잘하면 삶이 배로 편해지는 환경이었지만, 성적의 압박이 없어서 그런지 억지로 공부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때그때 내가 만나는 상황에서 필요한 말을 습득했고, 정 모르겠으면 원어민 동료를 붙잡고 물어봤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선생님이자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았던 동료들에게 정말 고맙다. 아마 30대의 나는 해외에서 또다시 일을 하고 있을 텐데, 그때를 위해 지금도 내 영어공부는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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